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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디 셔먼(CINDY SHERMAN)

· about Photograph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년 뉴저지 구태생
버팔로 대학에서 순수미술전공

1976년 졸업후
첫개인전
1978~1979 무제 필름 스틸(Untitled Film Stills, B&W)
셔먼의 사진(셀프 포트레이트)는 형용할 수없는 불가사의한 분위기에 당황하게 한다
그 불가사의한 분위기의 배경은 단순한 사실에 근거한다. 즉, 찍혀져 있는 인물은 모두 동일인물인 것이다.카멜레온과 같이 변신과 분장을 통해 다양한 인물로 분하고 있지만 그녀 자신의 셀프 포트레이트인 셈이다

Cindy Sherman self portrait

'사진의 탈 장르화'

지난 95년 처음 열린 광주 비엔날레를 관람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출품된 미술품의 감상 문제로 곤혹스러움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 그 동안 평면미술에만 익숙해 있던 우리들에게 비엔날레의 여러 작품들은 단순히 난해함뿐만 아니라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주었다. 아름다운 감성의 표현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털 뽑힌 닭을 투명한 알콜 병에 담아 두었다든지 흐릿한 비디오 테이프가 애매한 음악과 함께 뜻도 없이 영사된다든지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무식이 탄로 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애써 고개를 끄덕거려 보면서 나름대로 감상했으리라.
몇 장의 사진이 한 조를 이루어 걸려 있던 것도 있었는데, 사진가의 입장에서 사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정확한 핀트, 질감(texture) 등이 무시된 작품 앞에서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기존의 관념들이 여지없이 깨어지는 이 작품들 앞에서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른바 설치라는 새로운 장르로서 사진, 페인팅, 음향, 비디오 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었다. 미술에 있어서 탈 장르의 현상은 사진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다른 미술 분야들이 그렇듯이 사진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하위 장르로 분류되곤 한다. 내용에 따라서 리얼리즘과 살롱 사진, 재료에 따라서 흑백과 칼라 등 여러 가지로 구분되고 있으며, 이들은 각각의 영역을 지키려는 사진가들에 의해 소중한 이데올로기로 무장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점차 사진에서도 탈장르화는 물론 사진 자체에 대한 새로운 변화들이 시도되고 있다. 예컨대 흑백이냐 칼라냐의 구분은 토닝(toning)과 리터칭(retouching) 기술에 의해 무의미해졌다.

'나는 아티스트다'

어떤 사진가는 스스로를 사진가(photographer)로 불리기보다 아티스트(artist)로 불리기를 바란다. 신디 셔먼(Cindy Sherman)이 바로 그런 사진가의 한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을 사진가로 부르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나는 아티스트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그를 '사진 미디어 작가'라고 다소 애매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97 광주 비엔날레에도 초대되는 셔먼은 1987년 휘트니 미술관에 초대되어 회고전 형식으로 전시회를 가졌다. 이 전시회는 그녀의 명성을 곧바로 세계적인 사진가로 부상시켰다. 80여점의 전시작들 중에서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40여점의 「언타이틀드 필름 스틸 (untitled film still)」이었다. 이 「언타이들드」 작품들은 모두 셔먼 자신을 찍은 일종의 자화상들이다. 그런데 이 자화상에는 진정한 셔먼 자신의 모습은 하나도 없다. 셔먼 자신을 모델로 한 사진들이기는 하지만 영화의 스틸 사진처럼 마릴린 먼로, 소피아 로렌 등의 배우들이 연기했던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만든 것이다. 셔먼은 자신을 모델로 하여 기형인, 괴물, 우리 나라 TV에도 방송되었던 영화 「트윈 픽스」에 나오는 여자시체의 모습으로도 제작하었다. 셔먼은 사진 속에 자신을 등장시키되 그 이미지는 철저하게 자신이 아닌 기묘한 자화상들로 표현하였다. 어떤 사진은 우스꽝스럽고 어떤 사진은 공포감을 주며 어떤 사진은 아주 흔해빠진 대중성을 나타내고 있다. 아마 그는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 그런 모습의 현대 문명을 보여주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정체성의 상실

셔먼은 궁극적으로 분장된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현대를 이해하고자 했고, 또 현대를 표현하고자 했다. 사진으로 표현된 '나' 속에서 정신분석학적인「에고(ego)」의 적나라한 해부를 시도하였다. 자기이면서도 자기가 아닌 것, 즉 자기 상실의 모습을 기괴하거나 퇴폐적인 영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진정 '나'를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는가.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얼마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타인으로 분장된 자신의 모습으로 자기를 표현하고자 한 셔먼의 사진들은 그래서 충격적이다.
셔먼의 사진이 암시하듯이 현대 사진은 더 이상 회화주의의 모방이 아니다. 또한 전통적으로 주장되어온 사진의 기록성, 즉 현실의 묘사도 더 이상 사진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없다. 더우기 사진 장르의 파괴와 함께 멧세지의 난해성도 더해지고 있다. 한 장의 사진으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점은 분명히 평범한 사진인들과 관람자들이 인식해야할 중요한 점이다. 이제 사진도 작품의 이해보다는 느낌―그것이 비록 몰이해라 할지라도, 작품과의 맞닥뜨림에서 얻어지는 심리적 충격이 중요하게 되었다.
해석과 느낌
지난 93년이던가 금강변 곰나루에서 세계적인 설치 미술가들의 미술제가 있었다. 그 행사에서 어느 퍼포먼스를 구경한 적이 있다. 한 젊은이가 전자기타로 통속적인 음악을 연주하고, 그 반주에 맞추어서 다른 젊은이는 3류 잡지를 한 장씩 찢어서 입에 넣는 것이었다. 젊은이는 잡지 한 권이 다 들어갈 때까지 끊임없이 입 속으로 구겨 넣으면서 계속해서 구역질을 해대었다. 사람의 입이 과연 크긴 크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는데, 하여튼 엄청나게 많이 들어갔다.
찢어진 잡지를 가득히 입에 넣고 끊임없이 침을 흘리면서 구역질을 해대는 그 행위를 보면서 알량한 지식인의 관점으로 해석해 보았다. 저자는 지금 현대의 타락한 문화를 상징하는 잡지를 찢어 넣으면서, 그 문화에 대한 거부의 표현으로 구토를 하고 있구나 라고 나름대로 생각하였다. 아마 많은 관람자들이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구경하던 한 초등학생이 구토를 하였다. 그 아이는 보다 못해 실제로 구토를 하였던 것이다. 그 아이를 보면서 우리가 하고 있는 예술의 해석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 많은 관람자들 중에서 그래도 제대로 느끼고 감상한 것은 그 아이 하나가 아니었을까.

새로운 관점

사진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사진의 내용이 더 이상 미학적 추구의 대상이 아닌 지금 내용에 대한 이해보다는 느낌이 더 절실한 것 같다. 사진에서 금과옥조처럼 강조되어 오던 것들, 예컨대 구도, 앵글, 색의 밸런스 등의 틀에 얽매이면 올바르게 사진을 감상할 수 없다. 사진의 감상에서 객관적인 기준보다는 사진과의 대면을 통해서 얻어지는 주관적 느낌이 더 중요하다. 그 느낌은 아름다움일 수도 있고, 구역질 일 수도 있으며, 분노나 공포일 수도 있고, 난해함 자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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