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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EY BRODOVITCH (1898-1971)

· about Photograph,photographer

사진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창의력을 발휘해 사진을 찍는 것이다. 또한 사진을 보고, 느끼고, 평가 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을 수도 있고 아니면 참신한 기획의도를 갖고 화랑에 전시하면서 사진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다양한 사진가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지독한 짝사랑에 빠져 지내기도 한다. 한 사람의 사진가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는 것은 사진작업을 하는 것 만큼이나 큰 공부가 되고 커다란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많은 사진가의 삶과 예술세계에 접하다 보니 공통점 몇 가지가 있었다. 미국, 특히 뉴욕지역에서 활동하는 현대사진가의 인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수 많은 사진가들이 위대한 스승으로 꼽았던 사람이 바로 러시아 출신 이민자로 하퍼스 바자 Harper's Bazaar 잡지사에서 24년간 미술부장을 지낸 알렉세이 브로도비치 이다. 현대의 유명한 미국작가 중 그 사람한테서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는 어느 자료에서나 불쑥 불쑥 튀어나와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도대체 어느 정도 대단한 선생이었기에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영향력을 높이 사는지 궁금하다 못해 신비한 존재로까지 여겨졌다. 심지어 리차드 아베던은 '모든 디자이너, 사진작가, 그리고 아트 디렉터들은 그들이 의식하건 아니건 간에 알렉세이 브로도비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로 까지 말 할 정도 였다. 결국 알렉세이 브로도비치의 사진 사랑 대상은 훌륭한 사진가를 길러내는데 있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의 현대사진이 있기까지 이루어진 수많은 프로젝트는 구겐하임 박물관에서 지급하는 연구비로 제작된 것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사진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몇 년 씩 걸친 장기간의 작업에 가장 필요한 것 중 물론 사진가의 역량도 있지만 자금도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수백통의 필름 값을 비롯, 현상, 인화에 드는 엄청난 돈은 평범한 한 개인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된다. 사진가가 마음 놓고 사진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될 때 역사에 남을 훌륭한 작품이 많이 나오게 될것이다. 로버트 프랭크 Robert Frank 경우 1955년 이 기금을 가지고 1년간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쓴 필름은 500여 통에 달했다. 경찰에 위험인물로 고발 당해 감옥에 가면서 까지 사진 찍기에 몰두한 결과 '미국인 Americans'이라는 불후의 사진집을 낼 수 있었다. 브루스 데이비슨Bruce Davidson 역시 1962년 이 기금을 받아 '미국의 흑인들' 사진 집과 교량건설작업 현장을 연작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기회가 온다면 이처럼 훌륭한 사진집을 내는데 막대한 공헌을 한 구겐하임 Guggenheim 박물관의 연구비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볼 예정이다.
사진가로서보다는 사진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유명했던 알렉세이 브로도비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아쉽게도 사진을 많이 실을 수 없게 되었다. 브로도비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을 때 우연해 '1936-1963년까지의 뉴욕스쿨의 사진 The New York School Photographs 1936-1963'이라는 좋은 책을 발견했다. 이 책에는 미국의 현대 사진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뉴욕스쿨 출신 사진가 들의 면면과 사진사적인 의의를 잘 정리 요약해 놨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사진가의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의 디자인 하우스에서 '새로운 편집디자인의 개척자 알렉세이 브로도비치'가 출간 되었다. 이 책은 20세게 잡지 디자인에 혁신을 몰고 온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브로도비치가 한 역할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어 사진 교육자로서의 역할은 그리 많이 나와 있지 않지만 그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먼저 그의 유일한 사진집 '발레 Ballet'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하자. 이 책은 1935년부터 1939년까지 틈틈이 러시아 발레단의 모습을 무대 뒤에서 혹은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촬영 해 1945년 책으로 엮은 것으로, 그 당시 사진계에 충격을 주었다. 1932년 선명한 화질을 얻기 위해 대형 카메라의 조리개를 최소로 줄여 찍기 시작한 F64그룹의 출현으로 사진계는 얼마나 더 깨끗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F64그룹이 만들어진 이유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주축으로 유행하던 회화주의 사진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었다. 비록 브로도비치의 사진이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재현하지 않아 마치 드가의 그림 같지만, 연초점을 주로 이용하던 회화주의 사진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 동안 사진이 정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치중했다면, 그는 동적인 움직임과 현장의 감성까지 이끌어 냈다.
빠른 속도의 셔터를 이용 움직임을 정지시키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다면 느린 속도로 움직임의 흐름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그의 이러한 기법은 패션사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셔터속도와 노출을 정확하게 맞춰 흔들림 없이 선명하게 찍는 방법이다. 알렉세이 브로도비치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규칙을 어겼다. 사진교과서에 실린 모든 기초적인 기술을 다 깨우치고 난 다음 진정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틀을 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존 스자코프스키John Szarkowski 가 그들의 사진을 예측과 규칙보다는 직관과 강한 느낌으로 생산된 것이라고 보았듯이 이미 만들어진 규칙 속에서는 창의적인 작품이 나오기 어렵다. 피카소가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것은 몇 백년동안 사물을 평면적으로 그려왔던 관례를 깨고 사물을 입체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선명하게 찍는 것이 가장 프로답다고 생각했고, 빠른 셔터 속도를 이용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을 보여주려는 기술이 각광 받던 시기에 그는 정반대로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었다.
움직이는 물체를 찍으려면 빠른 속도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법칙을 그는 지키지 않았다. 라이카 카메라를 이용 1/2초 혹은 1초의 셔텨 속도 사진을 찍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러 카메라를 흔들기도 했고 심지어는 암실에서 인화할 때도 흔들리는 모습을 과장하기까지 했다. 이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랜드쇼프 Landshoff가 암실작업을 할 때 실수로 필름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것도 모른 채 필름을 밟았다고 한다. 당황한 랜드쇼프는 브로도비치에게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며 자초지종을 말했다. 하지만 브로도비치의 반응은 너무나 의외였다. 그것도 일어날수 있는 과정중의 하나이므로 있는 그대로 인화하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건만 봐도 그가 얼마나 기존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발레'원본은 1956년 펜실베니아 피닉스빌에 있는 브로도비치의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전소되었다. 책을 낼 당시 친구나 동료들에게 주기 위해 몇 백부만 발간했기 때문에 더욱더 귀해 지금은 구하기 힘든 희귀본이 되었다.
알렉세이 브로도비치는 1898년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사진경력과는 어울리지 않게 러시아에 있을 때 그는 군인으로 복무했다. 파리에 와서는 생존을 위해 다양한 일을 했고 러시아 발레단의 무대를 제작해 주며 발레단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 훗날 책까지 내게 되었다. 파리에서 살던 그는 한 학생의 부탁으로 미국으로 가 Philadelphia Museum School of Industrial Art 에서 디자인을 가르치게 되었다.
하퍼스 바자의 미술부장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그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퍼스 바자에서 그는 매 호마다 다른 디자인을 선보이면서 사진을 글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사진 그 자체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잡지를 디자인해 사진의 위상을 높이는데 이바지 하게 된다. 그러나 디자인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사진가의 의견을 무시한 채 사진을 마음대로 잘라내는 바람에 사진가들과 잦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같이 사진 한 장 한 장 마다 완벽함을 추구하던 작가의 작품마저 손을 대려 했다. 그러나 1937년 이후부터는 사진가의 입장에서 자르거나 변형시키던 습관을 자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퍼스 바자에 근무하면서 '디자인 연구소 Design Laboratory'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6년 필라델피아 시절부터 시작되었던 그의 수업은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의 후원하에 뉴욕에서도 지속되었다가 후에는 리차드 아베던의 스튜디오에서 이루어 지곤 했다. 그 당시 하퍼스 바자에서 일하는 것이 모든 사진가들의 희망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의 수업은 더욱더 많은 학생들이 참가했지만 그의 혹독한 사진 수업을 견뎌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인정하는 학생들은 성공을 거둬 '디자인 연구소'출신 중에서 유명한 사진가가 많이 배출되었다. 릴리안 바스만 Lillian Bassman, 히로Hiro, 아트 케인Art Kane, 어빙 펜Irving Penn, 다이앤 아버스Diane Arbus, 테드 크로너Ted Croner, 브루스 데이비슨Bruce Davidson,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리온 레빈스타인 Leon Levinstein, 리젯 모델Lisette Model,솔 라이터 Saul Leiter, 등등 수많은 사진가와 디자이너가 그의 수업을 듣고 사진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자신들만의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수업방식은 학생들에게 독특한 과제를 주고 현장학습을 시켰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해온 숙제는 다른 학생들로부터 호된 비평을 받게 된다. 매그넘 사진대행사의 최초의 여자 사진가였던 이브 아놀드 Eve Arnold 의 회고록에 실린 브로도비치의 수업방식을 보면 그는 자신이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배우게 했다고 한다. 이브 아놀드가 사진을 찍어 수업시간에 브로도비치와 학생들에게 보여주면 학생들은 엄격하게 비평했고, 화가 날 정도로 무자비 했기 때문에 그녀는 작품을 내미는 것조차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의 비평은 너무나 정확했다고 한다. 비록 6주간의 짧은 교육이었지만 이브 아놀드는 사진이 무엇인가도 알게 되었고 프로로 활약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자기의 사진을 남들 앞에서 평가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대단한 용기가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진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은 더욱더 많은 용기와 실력이 겸비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의 작품을 객관 해 시켜보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자기입장에서 판단해 보는 것 만큼 좋은 교육도 없을 것이다.
학생들의 작품 중에서 하퍼스 바자 잡지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 없이 잡지에 실어주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리젯 모델 Lisette Model의 경우는 전형적인 패션사진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녀가 카메라로 찾아내는 아름다움은 보통 사람들의 관점과는 거리가 멀었다. 브로도비치가 모델에게 준 첫 과제는 코니 아이랜드에서 여름풍경을 찍어 오라는 것이었다. 리젯 모델은 패션잡지에서 해변가를 찍을 때 당연히 등장해야 할 팔등신 미녀는 찍지 않고 검은 수영복을 입은 거구의 여인이 여유 있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을 찍었다. 이처럼 파격적인 사진을 선택했던 브로도비치 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최고의 스승으로 대접 받고 있는 것이다.
흐릿한 움직임, 평이한 구성, 힘있는 근접 촬영 등 다큐멘터리적 기법을 장려하면서 편집보다는 사진 자체로서 그래픽 효과를 더 내고자 했던 브로도비치는 사진의 위상을 높이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는 사진이 좋으면 편집자는 단순하게 작업 할 수 있지만 사진이 나쁘면 편집자가 다양한 기법을 구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백을 적절히 이용하고, 양면에 걸친 사진과 그 옆에 있는 간단한 기사, 혹은 기사와 사진의 그래픽적인 조화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 잡았던 그의 편집 방침 때문에 유난히 사진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만 레이Man Ray, 마틴 뭉카치Martin Munkacsi, 조오지 호닝엔-휴네George Hoyningen-Huene를 비롯, 다큐멘터리 사진가인 빌 브란트Bill Brandt,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워너 비숍Werner Bischof등 당대 최고의 사진과 들과 작업했던 것만 봐도 그가 사진에 얼마나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디자인계통과 사진계에서는 그토록 영향력을 발휘하던 그였지만 개인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해 재산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정신병을 앓고 있던 아들도 그를 힘들게 한 원인 이였다. 하퍼스 바자에서 일을 그만두게 된 이유는 알코올 중독으로 더 이상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60년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으로 워즈 아일랜드에 있는 맨해튼 주립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곳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병원과 주변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지만 발표하지는 않았다.
알렉세이 브로도비치는 1971년 프랑스에서 쓸쓸하게 운명을 달리했지만 그가 현대사진계에 끼쳤던 영향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명의 위대한 스승이 얼마나 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그 분야를 발전시킬 수 있는지 그의 삶이 증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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