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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마가렛 카메런의 초상사진에 대한 연구(상편)

Julia Magaret Kameron 1815 -1879

· about Photograph,photographer

현실과 이상의 불가능한 닮음

   

오늘날 우리들은 책을 통해 사진이론과 특히 그 역사에 관해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책은 많은 사학자들의 지적인 노력에 의해 연대순으로 집필해 놓은 최종적인 문집이다. 다른 인문과학의 책에 비해 특별히 역사책은 그 서술체계가 대부분의 경우 상당히 논리적이고 수학적이기 때문에(역사의 속성상) 어떤 사건들이나 경향들은 그들의 인과 관계나 혹은 상호 관계에 의해 일련의 규칙 속에서 진행된다. 말하자면 역사책은 일종의 퍼즐 맞추기와 같은 논리로 진행되고 또 사람들은 그렇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들의 논리적 사고에서 역사는 곧 진실의 "연속"이라는 것과 진실은 반드시 있다는 명제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책은 가장 믿음직한 추리소설에 불과하다. 역사는 어떤 과거 사실에 대하여 가능한 유일한 의미(univoque)만을 내포하려는 반면 기억은 언제나 여러 가지 해석을 갖는 다변적 의미(equivoque)를 함축하고 있다.1) 또 시간이 흐를수록 역사의 강압적 의미는 정당화되고 반면 기억은 그 만큼 모호해 진다. 그래서 역사는 진실에 대한 연구대상이면서 동시에 왜곡과 조작에 대한 경계의 대상이 된다.
사진의 역사, 이는 오랫동안 미술사의 음지에서 은닉되었던 미술과의 공생적 역사였다. 이러한 역사가 한 예술장르의 역사로서 인식된 것은 사실상 20세기 후반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사진사는 존재했지만 그것은 사진의 여사라기보다 미술사의 틀 속에 끼워진 논리적 연속의 역사였다. 사진의 역사는 대체로 1970년대를 거치면서 사진으로서 역사를 보았고 그 진실의 추적 또한 상당한 진전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사진이 마술의 그림과 근본적으로 관점(index)을 달리하듯 사진의 역사도 다른 일반 예술의 역사 특히 미술사와 근본적으로 다른 양면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런 양면성은 사진의 역사를 더욱 모호하게 하고 있다 : 한편으로 볼 때, 사진은 어떤 조건에서든 반박 할 수 없는 과거사실의 증거 즉 "~존재했던 것" (ça a été) 혹은 "~연출되었던 것"( ça a été joué)2) 이라는 사실에서 흔히 정치 사회의 일반적 역사에서 행하여진 조작이나 왜곡을 본원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보도사진이나 역사적 사진이 부인할 수 없는 어떤 증거적 사실을 폭로하듯이 과거의 어느 한 예술적 사진에는 기계적 생산물로서 적어도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기술적 증거들이 현지의 왜곡도 없이 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진정한 유물창고 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진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미술사와 다른 증거의 역사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진의 역사는 반대로 일종의 번역의 역사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언어라는 표현 도구 대신 이용된 사진적 언어는 자신의 절대적 사실주의(analogon)라는 원죄로 인해 언제나 다원적 번역을 쉽게 허락하기 때문이다. 반면 미술사는 이미 채색된 번역으로부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종의 환원적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반적 역사는 소설의 역사 혹은 진술의 역사라고 한다면 사진의 역사는 시의 역사 또는 암시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사진은 특히 대다수의 19세기 사진들은 사진이 표명하는 사실(denotation)외에 원칙적으로 어떠한 설명도 주석도 그리고 제목도 남기지 않았고 아직도 많은 19세기의 사진들은 익명으로 발견되며 거의 대부분 아마츄어 사진들이다. 어떤 경우에는 사진사에서 진술된 논리적 해석이나 번역이 그것에 관계하는 사진의 진술과 틀리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진의 진술이 그 사진에 관계하는 설명이나 주석의 과장 또는 왜곡으로 인해 문헌적 자료를 근거로 하는 역사적 내용과 다르게 판명되는 수도 있다. 오늘날 19세기 사진에 대한 역사적 진실의 추적은 문헌에 의거한 획일적이고 논리적인 번역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사진이 진술하는 증거적 해석에 있는 경향이다. 몇몇 19세기 사진들은 이미 그들의 역사적 해석과 번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학자들의 연구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바로 사진의 애매한 양면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오늘날(20세기 후반) 사진사학자들에 의해 예술적 가치가 새롭게 밝혀진 몇몇 탁월한 19세기 사진가들 중 한 작가를 꼽는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영국 빅토리아시대의 여류작가, 쥴리아 마가렛 캐머런 Julia Magaaret Cameron(1815-1879)을 생각할 것이다. 힐과 아담슨의 사진이 20세기 초 월터 벤자민에 의해 발굴되었다면 캐머런 부인의 사진은 19세기말 알프레도 스티글리츠에 의해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캐머런 부인의 사진에 대해 진정한 연구는 부인이 죽고 난 후 약 백년 후인 1970년대 헬뮤트 게르샤임(Helmut Gernsheim)과 또 그를 따르는 몇몇 사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캐머런 부인은 우선 다른 19세기 유명한 사진사들(Lewis Carroll. Humbert de Molard, Demachy, Puyo등)과 마찬가지로 아마츄어 사진사이다.(그러나 이들의 사진들이 사진의 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롤랑 바르트의 아마츄어 사진론 참조) 아마츄어 사진가는 사진을 도구로 경제활동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데 단지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본 분류일 뿐이다. 그러한 관점에 볼 때 비록 부인이 당시 엄청나게 비싼 사진재료를 사기 위해 몇몇 자신의 사진들을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쥴리아 마가렛 케머런은 자신의 자아성취(바르트의 용어로 R'equichot)를 위한 대표적인 아마츄어 작가로 간주되고 있다.
캐머런 부인의 사진들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요소는 대부분 그녀의 초상 사진들이 귀족적 이미지를 주는 강한 개성의 사진들이라는 것이다. 당시 다른 사진작가들과 비교해 볼 때, 그녀의 사진들은 시대를 초월한 비정형적인 형식 속에서 치밀히 계산된 연출사진, 더 정확히 말해 연극화(Théatralisation)된 사진들이다. 오늘날 모더니즘적 시각에서 볼 때 그녀의 사진은(작가가) "찍는 대상이 빛을 발하는 주어진 대상(objet donne : ça a ét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는 주제(sujet : ça a été joué)"에 있는 사진, 다시 말해 어떤 주어진 현실을 활용하는 독창적이고 주관적인 사진에 관계하고 있다.3)
이런 의미에서 케머런 부인의 사진은 순수 사진 이라기보다 일종의 조형적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강한 개성은 연극화된 사진이 진술하는 내용보다는 사진 자체에서 발하는 어떤 "초월적인(transcendant)현상" - 현실에 근거를 두는 경험적인 실체로부터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세계로 지향하려는 현상 - 에서 비롯된다. 이런 현상은 사실상 캐머런 부인의 "독창적인 사인'으로 간주되고 대부분의 그녀의 사진들을 특징짓는 사진적인 흐린 효과(쉽게 말해 연촛점)에서 온다. 그러나 이런 효과는 사진에서 어떤 움직임을 암시하는 율동적 흐린 효과(filé)나 혹은 시간성을 암시하는 은유적인 흐린 효과(기억의 레미니센스, 환상, 착각 등)가 아닌 의도적으로 연출된 주제에 대한 존재론적 번역에 관계한다. 의심할 바 없이 이때 시간성은 무시간성이고 더 이상 현실에 근거를 두지 않는 이상적 존재의 표현일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19세기 사진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캐머런 부인의 사진들은 오는날까지도 많은 초상사진작가(Diane Arbus, Richard Avedon 등)들이나 비평가들에게 불멸의 모델이 되고 있고 또한 우리들을 매료시키는 주된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논단의 관점은 쥴리아 마가렛 캐머런의 사진에서 나타나는 사진의 흐린 효과에 대한 심층 분석에 있어야 함은 자명한 일이고 분석적 명확함을 위해, 한편으로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또 한편으로는 의미적 측면에서 접근해 보기로 한다.
캐머런 부인의 사진에서 발하는 시적이고 영감적인 흐린 효과는 대부분의 경우 사진에 있어 극단적으로 줄어진 심도(out of focus)에서 온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엄청나게 발달된 렌즈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렌즈의 흐린 효과라고만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캐머런 부인의 사진을 몽롱하게 하는 효과는 단지 렌즈의 효과뿐만 아니라 엄밀히 말해 총괄적으로 사진의 선명도를 줄이는 조명, 사진판, 인화 등의 다른 간접적인 이유에도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효과를 단순히 연초점(out of focus)효과라고만 해서는 안 된다.
20세기 초 스티글리츠가 이끄는 [Camera work](1903-1917)에 의해 탁월한 예술적 의도로 재평가된 이런 사진적 흐린 효과는 캐머런 부인의 당시에도 또 그 후에도 오랫동안 많은 비평가들의 견해 속에서 작가의 의도적 효과로 간주되었다. 당시 영국의 왕립사진협회에 의해 열려진 그녀의 첫 사진전(출품작)에서 비평가들은 비평을 아끼지 않았다. 캐머런 부인은 당시 작업적 사진사들의 세심한 정확성보다는 사진의 서정주의를 선호했는데 그들은 그녀가 선구자라는 것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녀의 사진의 기술적인 불완전함과 특히 완전히 의도적인 흐린 효과를 나무랐다. 그 후 1866년 여론에서 "캐머런 부인은 그의 사진적 결함을 자신의 성공으로 받아들여 그 후 체계적으로 흐린 사진을 실행하는 지혜를 가진 첫 작가였다"4)고 논평했다. 20세기의 저명한 사진사가들 중 한 사람인 뷰먼트 뉴홀 마저도 이런 사진적 흐린 효과에 대해 같은 생각을 했는데 그는 "캐머런 부인이 인화 할 때 가끔씩 세밀한 정확성을 줄이기 위해 음판과 종이사이에 유리판을 끼웠다"5)고 진술했다. 그러나 얼마 후 1970년대 게른샤임이 언급한 말에 의하면 사진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이러한 시도(유리판 삽입)는 진실과 거리가 멀고 반대로 흐린 효과는 사실상 작가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해 게른샤임의 총괄적인 자료분석의 결과는 당시 사진적 기술의 한계와 캐머런 부인의 기술적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그녀의 의도적 흐린 효과를 부정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또한 그것을 그녀의 의도적 예술 표현이라고 암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물론 이런 설명은 단지 말없이 출현하는 사진의 진술보다는 대부분 작가를 둘러싼 몇몇 신빙성 있는 문헌적 자료에 의한 것이지만 현존하는 캐머런 부인의 사진에 대한 논평 중 가장 타당한 설명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게른샤임이 말했듯 흐린 효과가 부인의 의도가 아닌 기술적 문제에서 온 당연한 결과라는 사실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과장과 왜곡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문헌적 자료에 의해서가 아닌 사진의 진술을 토대로 한 기술적이고 논리적 설명이 필요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사진으로서의 역사를 추적하는데도 필요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게른샤임이 궁극적으로 부인의 흐린 효과에 대한 타당한 결론을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논고는 그가 제시한 많은 실증적 자료 위에서 또한 사진의 진술에 의거하여 나름대로의 이런 명제(의도, 비의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추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 생각한다.
캐머런 부인의 사진활동은 부인의 나이 거의 50이 되는 1864년 초에 시작된다. 사진 기술 발달사에서 1850년대의 상업초상사진의 대단한 성공 이후 1860년대는 우선 사회적으로 사진활동을 하는 계층의 변화가 생긴 시대이다. 1862년 이후 사진산업의 성공으로 인한 사진의 대중화6) 즉, 정열적인 이마츄어 사진 시대가 열렸고 결과적으로 사진은 더 이상 특권계층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진활동을 하는데 있어 당시 한 아마츄어 사진사에게는 사진 화학적 기술(콜로디온 방식)을 습득하고 충분한 광학적 지식을 갖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많은 기술적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사진 실행자 자신이 직접 모든 사진의 단계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당시 사진 제작술은 일반사람들의 눈에는 대단한 기술로 보였다. - 사진기(원래는 "카메라 옵스큐라"라고 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사진기라고 하기로 한다.)를 산다는 것은 사진에 필요한 렌즈와 동체, 사진판, 사진판 틀, 인화용 음판 틀, 화학품 일체, 집기, 사진욕조, 머리 고정대 등 제반 모든 것을 셋트로 사는 것이며 한 아마츄어 사진사가 기본적으로 읽어야 할 사용법 교본은 무려 몇 백 페이지에 이른다. 아마도 캐머런 부인이 1863년 12월 그녀의 출가한 외동딸로부터 처음 사진기를 선물로 받았을 때 그녀는 사진에 관한 지식은 전혀 없었고 특히 렌즈의 개념에 대하여서는 전혀 무지했던 것 같다. 유일하게 교육을 받은 것은 같은 해 당시 유명한 영국의 사진사 레일렌더가 부인이 살던 웨이트 섬에 문학가 알프레드 테니슨을 찍기 위해 왔을 때 그가 그녀에게 사진기의 기초적인 작동법을 가르쳐준 것(아마 며칠동안)이 고작이었다. 그 후 다음해 1월 달에 자신의 첫 성공작을 보았다. 사실상 당시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서 한 여자가 아마츄어 사진사로 활동하기에는 많은 사회적 제약을 가졌고 또한 그녀가 받았던 유리판 콜로디온 방식의 덩치 큰 사진기는 그녀에게는 장난감이 아니었다.
보다 더 자세히 언급해 보면 캐머런 부인이 처음 소유한 사진기는 일반적 용도를 목적으로 하는 아마츄어 사진기인데 한 동체(상자)가 기아에 의해 다른 동체로 끼워지는 접합식 구조로 되어있다. 또 사용할 수 있는 최대 크기 사진판은 11݅ 9인치(약 28 ݅ 23cm)이고 프랑스에서 제작된 "자민(Jamin)"이라는 상품의 이중렌즈(오목과 볼록을 합친 렌즈와 양철면 렌즈의 이중구조로 된 렌즈이다. 이중렌즈는 메니스크 렌즈 이후 프랑스에서 1840년 초상사진용으로 시판된 렌즈로 그 후 거의 모든 사진기 렌즈는 이중렌즈의 개조품이다)를 갖추고 있다. 이 렌즈는 나중 1890년 영국의 유명한 광학자인 토마스 로스 달메이어에 의해 검증되는데 그에 의하면 "자민(Jamin)은 12인치 초점거리를 갖는 3인치 지름의 렌즈이다. 또한 지름이 1-7/8인치 다시 말해 약 f/6에서 f/7쯤 되는 고정 조리개를 갖고 있다. 그것은 페츠발(Petzval)타입의 렌즈로 구면수차가 없는 대신 양성 유색수차7)가 있다"8)라고 말하고 있다. 오토스코프Orthoscope(독일어로는 Orthoskopisch)라고 불리는 이런 페츠발 타입은 당시 1850년대 유행이었던 풍경과 인물사진을 위한 렌즈이다. 또 이 렌즈는 이런 용도의 큰 사진판을 위해 오래 전에 만들어진 한 구형 페츠발을 모델로 개조된 것으로 1858년 독일 포익트랜드 브라운 슈바이크(Voitlanger de Braunschweig)회사에서 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 구형 페츠발은 "다게레오 타입의 초상사진에 활용되도록 만들어진 단초점 오리진 페츠발 보다 훨씬 긴 장초점 렌즈로 1840년 만들어져 통용되다가 렌즈의 심각한 수차문제 때문에 곧 페지된 페츠발의 한 모델"9)이였다.
게다가 초상사진 제작에 큰 장애물인 유색수차는 심각했다. 그런데 케른샤임에 의하면 원래 "옥토스코프 렌즈는 화면의 뒤틀림(distorion)으로부터는 교정된 렌즈이고 원칙적으로 심각한 유색수차를 교정한 이중렌즈(achromatique)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머런 부인의 렌즈는 특별히 유색수차를 심하게 가지고 있는데, 이런 수차는 결국 "비록 시각적으로 사진기의 불투명 유리판 파인더역할에 모델의 이미지가 선명히 나타난다 하더라도 사실상 선명한 사진을 얻기에는 불가능하게 만든다"10)
캐머런 부인의 사진을 흐리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사용하는 사진판의 과도한 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사진판의 크기는 사용하는 렌즈의 초점거리에 달려있다. 약 30.5cm의 초점거리를 갖도록 제작된 자민 렌즈는 약 20cm의 초점거리를 갖는 초상사진 전문렌즈에 비해 제법 긴 편이어서 일반 초상사진의 사진판보다는 훨씬 큰 사진판을 쓸 수가 있다. 그런데도 캐머런 부인은 자신의 렌즈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 크기 사진판보다 정도가 지나치게 큰 사진판을 완고하게 사용했다. 다시 말해 부인이 사용한 사진판의 크기에 비해서는 초점거리가 너무 짧았다. 그 결과 사진의 흐림은 우선 렌즈에 잘못 적용된 사진판에서 볼 수 있다. 즉 지나치게 큰 사진판은 극단적인 심도의 축소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음 그림은 캐머린 부인이 사용한 렌즈와 사진판의 관계를 설명하는 그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심도를 결정하는 혹은 초점이탈의 정도를 나타내는 작은 착원란11)(E.F)인데 왜냐하면 사진의 흐린 정도는 착원란의 크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위 그림에서 부인의 사진판이 위치하는 C선상에 착란원이 지나치게 커져 있는데 주된 원인은 앞서 말한 렌즈와 사진판의 불균형에서 온다. 가장 선명한 사진을 갖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사진판의 크기는 약 15 ݅15cm정도 혹은 초점거리 30.5cm의 반쯤 되는 크기를 가져야 한다.12) 또 일반적으로 풍경사진용 렌즈이기 때문에 대상 A에 대한 시진판의 위치는 이 렌즈의 초점거리인 D선상에 위치해야하고 그럴 때 초점은 A가 되고 아울러 적당한 착란원 F를 갖는다. 이때 사진의 심도는 가장 깊어진다 : 단지 원경 A뿐만 아니라 착란원 F가 만드는 근경 B까지도 선명해 질 수 있다. 결국 이런 사진기는 풍경과 같은 원경촬영을 위한 사진기이다. 그러나 캐머런 부인이 사용한 사진판은 사진기가 허용하는 28 ݅23cm의 아주 큰 사이즈를 사용했다.
왜냐하면 사진대상은 원경 A가 아니라 근경 B이기 때문에 B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고 또 사진 사진판에 인물을 꽉 채워야 하기 때문인데 이를 위해 캐머런 부인은 사진판을 의무적으로 C에 초점을 놓아야 했다. 그 결과 B의 초점은 다소 B 근처에서 잡혀지지만 반대로 A의 초점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고 그때 심도는 지나치게 커진 착란원 E 때문에 극단적으로 축소되었다. 다시 말해 사진의 선명도는 단지 극히 부분적인 B 근처에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큰 사진판의 노출 부족 혹은 긴 노출시간 때문에 부인은 조리개를 활짝 열어야 했기 때문에 심도는 더욱 더 줄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이런 큰 조리개로 인해 사진의 선명도를 줄이는 렌즈의 수차들 특히 유색수차를 허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아무리 정확히 초점을 맞추었다 하더라도 이런 조건에서는 거의 선명한 사진을 얻기는 불가능했고 인화된 사진에 나타난, 전체적으로 흐린 윤곽이나 안개같은 현상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캐머런 부인은 도대체 이러한 사진의 결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정말로 자신의 사진에서 기술적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자신의 고백에서 암시된다. '다른 모든 사진작가들이 하는 것처럼(초점을 맞출 때) 완전한 초점까지 렌즈를 꼭 돌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가 초점을 맞추는 도중 내 눈에 아주 좋다고 판단되는 순간 난 거기서 중단했다"13) 이런 진술은 궁극적으로 경우에 따라 의도적으로 초점을 거부했다는 것인데 확실히 그녀의 사진들은 선명도에 있어 획일적인 통일성을 갖지 않는다. 물론 대다수의 사진들은 흐리지만 거의 선명한 사진, 부분적으로 흐린 사진, 거의 완전히 흐린 사진 등의 다양한 선명도를 갖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징적으로 원경을 의미하는 여러 명의 사진이나 장면을 묘사하는 사진들은 거의 선명한 반면 꽉 채운 큰 얼굴 사진에는 거의 흐려져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극도로 줄여진 심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진들은 아주 부분적이지만 정확히 맞춰진 초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론적으로 단 한곳이라도 초점이 있다면 그것은 극심한 심도를 축소시키는 요인 특히 사진기와 모델과의 너무 좁혀진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할 경우는 캐머런 부인의 대다수 초상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무덤의 천사 The Angel at the Tombe> 혹은 <베아트리스 Beatrice>는 가장 좋은 예가 된다. 예외적으로 <Mary Madonna>같은 경우는 완전히 흐려져 있다. 그녀의 진술처럼 초점을 맞추는 도중에 중단된 사진이라고 보기는 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특별히 이 사진에서 거의 전면적은 얼굴로만 채워져 있는데 사진판의 크기와 초점거리를 고려해 보면 아마도 캐머런 부인이 큰 사진판에 얼굴을 꽉 채우기 위해 렌즈를 지나치게 모델 앞으로 가져가 거의 초점을 조절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렌즈의 초점은 최소한의 거리를 요구한다) 캐머런 부인의 초상사진 촬영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 할 수 있는 결과물로서의 찍혀진 사진(objet photographie)이 아니라 사진을 이용한 모델의 정신적인 숭고함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과물로서 나타나는 사진의 선명도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녀의 눈에는 손상되고 흐리게 나온 사진들이 좋게 보였다. 캐머런 부인이 당시 한 전시회에 보낸 초기 사진들을 보고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부정적 반응을 보였는데, 그 후 캐머런 부인은 이런 비평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이런 사실은 1864년 당시 그녀와 각별한 관계를 갖고 있는 존 허셀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서 읽을 수 있다. "도대체 초점이 뭡니까? (사진에서)어느 정도의 초점단계가 합법적이라고 누가 말 할 수 있습니까?" 14)확실히 이러한 질문은 사진의 기술적인 측면에 대한 그녀의 무지를 말해준다. 앞서 보았듯이 그녀의 사진샐행에서 자신의 사진판을 줄이지 않는 한, 또는 사진기를 바꾸지 않는 한, 선명한 사진을 얻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게다가 사진적 경험도 없었고, 또 그녀가 사용하는 사진적 기술을 개선할 능력도 없었다는 점을 보아 흐린 효과는 결과적으로 그녀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진적 기술의 무지와 한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그런데, 1866년 봄 쥴리아 마가렛 캐머런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사진기보다 더 큰 사진기를 샀다. 이 사진기는 예전의 "자민" 사진기와는 달리 사진판의 크기가 15 ݅12인치(약 38 ݅30.5cm)의 작은 사이즈에서부터 22 ݅18인치(약 56 ݅46cm)의 큰 사이즈까지 다양한 크기의 사진판을 적용 할 수 있도록 만든 사진기이며, 렌즈는 1866년 독일에서는 광학자 슈타인하일에 의해 또 영국에서는 달메이어(Dallmeyer) - 훗날 캐머런 부인의 아들과 함께 부인이 사용한 렌즈들을 면밀히 조사한다 - 에 의해 창안된 "라피드-렉틸리니어Rapide-Rectilinear"타입 혹은 줄여서 "R-R"이라고 하는 신형 이중렌즈를 갖추고 있다. 이 렌즈는 약간의 빛의 반사(refkexion)와 뒤틀림(distorsion)을 제외하고 거의 완벽한 대칭으로 수렴하는 두 개의 오목-볼록렌즈(메니스크)로 구성된 무수차 렌즈(Aplanat) - 특히 측면 유색수차(achromatismelateral), 코마(coma)는 잘 교정되고 또한 난시(astigmat) 역시 줄여진다 - 이다. 그러나 화면의 왜곡(lacourbure de champ)과 오늘날까지도 완벽하게 제거 할 수 없는 구면수차(la'berration sph'erique)는 남아있다. 30인치(약 76cm)의 긴 초점거리를 갖는 'R-R"렌즈는 당시 신제품으로 시판 초기부터 주제의 선택에 따라 다양한 크기의 사진판을 사용 가능케 하면서 풍경과 인물 그리고 초상사진까지 찍을 수 있다고 하는 다목적 렌즈이다 : 그러나 제품의 사용책자는 소비자들에게 사진대상이 풍경일 때는 22 ݅18인치, 인물일 때는 20 ݅16인치의 사진판을 권하고 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캐머런 부인의 큰 사진판은 이 렌즈 덕분에 어느 정도 적당한 초점거리에 놓일 수 있고 또 심각한 수차들에 의해 야기되던 몇몇 왜곡과 흐림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 사진기로 어떤 주제라도 선명하고 깨끗한 사진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조리개를 가능한 줄여야 하는 조건을 달고 있다. 그 이유는 대형 사이즈에 속하는 이 사진기의 초점거리(자민 렌즈의 초점거리보다 약 2.5배)가 너무 길기 때문에 어느 한계이상 조리개를 열면 ㄱ심도는 극도로 줄어지기 때문이다.(망원렌즈의 심도) 그래서 엄밀해 말해 "R-R"렌즈 사진기는 짧은노출을 요구하는 전문 초상사진용이 아니라 대중을 위한 다목적 사진기로 출시된 것이다. 이러한 사용 조건에도 불구하고 캐머런 부인은 모델의 포즈시간을 줄이기 위해 조리개를 활짝 열었던 것 같다. 게른샤임은 "부인이 선명한 사진을 얻기 위해 그리고 심도를 깊게 하기 위해 작은 조리개를 사용했다면 사진판의 노출시간은 거의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너무 긴 노출로 인해)"15) 라고 부인의 큰 조리개 사용을 추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진판의 노출시간은 수 분에 달했고 그때 모델에게는 일종의 고문이 되었다. 그 결과 비교적 성능 좋은 사진기로 바꾸었음에도 사진의 흐림은 여전히 나타났다. 이때 흐린 효과는 단지 줄어진 심도뿐만 아니라 모델에게 강요하는 너무 긴 노출시간 때문이라고 게른샤임은 1866년 이후 제작된 부인의 사진들을 모아 면밀히 조사한 결과로서 말하고 있다. 긴 노출은 모델에게 "머리 고정대 없이 7분 이상이나 포즈를 취하게 했고 부인이 만족할 때까지 고문을 반복시켰다."16) 그것에 관해 어느 한 부인의 모델은 "머리 고정대 없이 10분 가량"17) 이라고 증언했는데, 사실상 이러한 긴 노출에서는 머리칼, 눈썹, 호흡 등에 의한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사진은 흐려질 수 밖에 없다. 이런 노출 시간에 대해서는 잠시 후 다시 보기로 한다.
쥴리아 마가렛 캐머런의 사진에서 흐린 효과를 야기시키는 요인은 단지 렌즈, 조리개, 초점거리 등 사진기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부인이 사용한 사진판에도 있다. 캐머런 부인은 당시 다른 사진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촬영을 위한 사진판 준비 작업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해야 했다. 1860년 대에 넓게 이용되었던 감광 방식은 유리판 습식 콜로디온18)이었는데, 그 주요한 이유는 노출에 있어 놀라운 감광 속도와 알부민 방식에 맞먹는 부드러운 입자 때문이었다. 그러나 습식 콜로디온 방식에서 가장 큰 불편은 사진판 준비작업의 복잡성은 둘째 치고 콜로디온이 발라진 젖은 상태의 사진판을 즉각적으로 노출시켜야 하고 또 곧바로 현상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 방식은 처리도중 아주 작은 충격이나 온도의 급작스런 변화가 생길 경우에는 결정적으로 음화를 망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세심한 주의와 숙달된 노련사를 요구한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다게레오 타입에서 은판위의 요오드 처리과정처럼 유리판 위에서 콜로디온 층을 균일화하게 하는 작업인데, 이 작업은 중요하게 사진의 성패를 좌우한다. 한 아마츄어에게 이런 기술적 요구는 상당히 큰 장애물이 되었"는데 특히 여자의 경우 더욱 더 힘들었다. 왜냐하면 제한된 시간에 어떤 사진판은 두께가 무려 1cm가량 되는 무거운 유리판을 두 손가락으로만 잡고 콜로디온이 한쪽 방향으로만 흘러 가도록 지탱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 흐르는 방향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 공식대로라면 불과 수분 내에 끝내야 한다.
노출 후 만약 문제가 생기면 음화나 양화에 직접 손으로 재손질(retouche)을 해야 하는데, 특히 유리판 습성 콜로디온 방식에서는 사실상 대부분의 경우 재손질을 거쳐 사진이 완성된다. 그처럼 보편화 된 재손질 때문에 당시 "사진 잡지에서는 재손질의 타당성과 부적합성에 대한 많은 논쟁을 벌였다."19) 사진 기술에 있어 초보자였던 캐머런 부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상 "1864년과 1866년 초에 제작된 캐머런 부인의 많은 사진들은 기술적문제를 노출하고 있는데, 사진들은 많은 작은 구명들을 가지고 있고 콜로디온의 불균형 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녀가 아직도 기술적인 총분한 지식 없이 작업했다는 것을 말해준다."20) 또 흔히 "부인의 사진들은 창백하고 손자국과 먼지자국을 노출하고 있다."21) 이와 같이 캐머런 부인은 조작 미숙에서 온 많은 자국과 오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인으 이런 오점들을 간단한 수정과 손질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사진판에 남겼고 오히려 사진의 오리진을 강조하면서 의도적으로 재손질을 거부했다. <두목걸이를 한 여자의 초상>에서 보여주는 많은 손자국과 오점들은 사진의 재손질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처럼 캐머런 부인은 집요하게 손대지 않는 사진의 "찍힌 그대로", 즉 사진적 순수성(nature)을 주장하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그녀의 사진틀 위에 "Form Life"라고 적은 글귀 옆에 나란히 표시 되어있는 "Untouched"의 의미를 이해하게 한다.
사진의 흐린 효과는 렌즈 이외 노출시간을 지연시키는 중요한 두 원인인 큰 사진판과 지나치게 약한 조명에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우선 캐머런 부인의 사진판을 보면 부인의 모든 사진작품에 나타난 사진판의 크기는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1866년 봄까지 사용한 사진판의 크기인 11 ݅9인치(약 28 ݅23cm)이고, 또 하나는 그 이후 "R-R"렌즈와 함께 사용한 좀 더 큰 사진판 치수인 15 ݅12인치(약 38 ݅30.5cm)이다. 그러나 부인 1866년 이후부터는 사진판 사용에 있어서 두 가지 치수 모두들 혼용했는데, 그 이유는 "자민" 사진기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사진사들은 장초점 렌즈가 장착된 사진기라도 풍경사진의 경우(그럴 경우 아주 작은 조리개를 사용)외에는 큰 사진판을 선택하지 않았다. 명함판 사진이 이미 보편화된 시대적 상황을 볼 때 부인의 사진판 사용은 아주 특별한 경우이고 게다가 이런 큰 사진판은 한 여자에게 상당한 불편과 어려움을 가져다 준다. 그럼에도 부인은 집요하게 큰 사진판을 선택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자신의 특별한 욕구, 다시 말해 사진을 그림의 초상과 동일시하면서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종교관에 부합하는 자연(nature) - 물질적인 개념이 아닌 "살아있는, 혹은 신에 의해 창조된"의 의미 - 에 대한 표현의 욕구 때문이며, 또한 초상사진을(당시 인간의 고귀함, 숭고함, 영원성을 상징하는)그려진 초상화로 승화시키려는 욕구 때문이다. 이러한 부인의 욕구는 당연히 형식적인 미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실물크기(fromlifr)"와 관계함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또한 큰 사진판 사용은 사진에 있어 당시 기술적 한계의 이유도 있다. 다시 말해 부인이 "큰 사진판을 선택한 것은 기술적 이유로 볼 때 사진적 확대는 은 취화물 종이가 시판되기 전까지 불가능한 방식 이였다는 사실에 관계하고 있다"22) 그래서 부인의 큰 사진판 사용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고, 실지로 그녀는 확대의 개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1850년대 화가이자 사진사이며 또한 사진기술자였던 샤를르 네그르(Charles Negre)의 사진에서도 가끔씩 정도를 지나친 큰 유리 사진판을 볼 수 있는데, 만약 그가 음화로부터 확대의 개념을 알았더라면 그는 오늘날 또 다른 사진 혁신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진의 예술적 질은 단지 사진판의 크기에 달려 있을까? 역설적으로 우리는 힐과 아담슨이나 나다르 혹은 카르자 같은 동시대의 탁월한 사진가들이 남긴 많은 사진들의 크기는 대부분 고작해야 대략 오늘날 A4용지 크기 만한 1/2전 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보자.
초상사진을 실행함에 있어 조명은 사진의 성공을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원칙적으로 모델을 비추는 조명에 대한 특별한 규칙은 없다. 그러나 몇몇 당시의 사진사들이 정해놓은 조명의 규범은 초상 사진에 있어 큰 영향을 미친다.(전통적 방식으로 볼 때 우선 모델의 머리 위에 수직으로 내려 비추면서 윗눈썹 밑으로 서양인의 골격기준) 코밑으로 그리고 얼굴의 튀어나온 부분 밑으로 그림자를 지게 하는 강렬한 빛은 피해야 한다. 반대로 모델의 정면과 양쪽에서 직접 비추는 수평 빛들은 필요하다. 그럴 경우 조명은 효율적인 빛의 효과를 얻기 위해 배경에 위치하는 커텐들을 이용하여 조절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인 전체적으로 너무 강하거나 너무 약하면 흑백사진의 경우 음양을 구별시키는 듯한 반쪽 얼굴이 나오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피해야 한다.23) 그러나 캐머런 부인은 반대로 모델의 머리 위, 혹은 양쪽 측면 위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좁게 집중된 빛만 사용하고 나머지 빛들은 조형적 효과를 얻기 위해 배경에 있는 차양을 이용해 차단해 버렸다. 부인은 또한 검은 그림자를 강조하기 위해 검은 배경과 검은 벨벳 천을 이용해 약간의 빛만 모델의 얼굴에 반사되도록 했다.24) 이러한 방법은 당시 사진에서 익숙치 않은 방법이고 전형적 초상 시진조명방식과는 대조를 이룬다. 캐머런 부인은 그렇다고 한가지 조명 방식에 만족하지 않았고, 끝없이 부인의 이상에 적합한 여러 가지 비정형적인 조명방식을 렘브란트 식의 '음양효과(Claine-obscure)"방식으로 전통적 그림과 관계하고 있다.
사진을 흐리게 만드는 직접적인 요인 중 하나는 긴 노출시간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장초점과 큰 사진판 그리고 약한 조명은 결정적으로 부인의 사진 실행에서 노출을 연장시키는 원인이 된다. 아마도 부인은 이런 분제를 해결하기 위해 큰 조리개를 쓴 것 외에는 별다른 기술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캐머런 부인이 자신의 사진에 대한 야망(의도)은 기술적 측면이 보장하는 사진적 결과물, 즉 찍는 대상보다는 그 대상인 모델을 통해 찍히는 주제나 연극적 상황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노출시간은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노출시간이 수분에 달하면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진촬영이 아니라 고문이 될 것이다. 부인의 모델이나 주위의 비평가들에 의하면 부인이 모델에게 강요하는 노출시간은 무려 10분까지 달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어느 정도 노출시간이 길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부인의 한 모델이 고백한 글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진 촬영은 시작 되었다. 일분이 흘렀을 때 난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또 다른 일분이 지났을 때 난 내 눈동자가 눈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또 다시 일분이 지나자 내 목은 마비가 된 것 같았고, 4분이 지났을 때는 촬영을 위해 쓴 나의 너무 큰 왕관이 이마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5분이 흘렀을 때는 난 완전히 무너졌다. ...중략... 첫 사진과 두 번째 사진은 마치 지진 때 찍은 사진 같았지만, 세 번째 사진은 비록 10분 가까이 서서 재현하는 것이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문임에도 불구하고 보다 성공적이었다."25) 게른샤임은 이런 증언에 대해 의심할 바 없이 모델은 포즈시간이 약 10분 정도 느껴졌을 것이지만, 이런 증언은 문학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결론적으로 다소 과장된 증언이라고 한다. 확실히 이런 긴 포즈시간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사진적 생산물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사진이 아닌 예술적 표현을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 생각한 캐머런 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다소 그럴듯한 사실로 받아 들일 수 있다. 그렇다고 과연 10분 정도의 노출시간이 필요했을까? 우리들의 논고는 추리적 방식이 아닌 가능한 실증적 자료와 논리적 방법에 의거하여 캐머런 부인의 사진에 적용된 실증적인 노출시간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이러한 긴 노출시간으로 자연스럽고 생생히 살아있는 모델을 보여주는 사진을 만든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1840년대 초 사진 초기에는 사진 발명자나 개척자들이 너무 긴 노출시간(약 10분 이상)때문에 단지 죽어있는 시체나 굳어 있는 모델만을 촬영했는데, 그때 모델은 그야말로 두 눈을 감고 땡볕에서 고문을 받아야 했다. 특히 눈은 반드시 감아야 했다. 특히 눈은 반드시 감아야 했는데, 그 이유는 움직이는 눈꺼풀은 결과적으로 사진에서 눈만 반쯤 지워진 얼굴을 만들기 때문이었다. 사진 발명 이후 첫 초상사진이 나왔을 때, "인간의 모습은 검게 되었고 얼굴의 경련과 찌푸린 인상은 포즈 당시의 고통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럼에도 눈은 반쯤 열려 있는데, 얼마나 모델이 자 참았는가! 사진에서 이런 얼굴의 경련을 위해 모텔에게 눈을 감게 해야 한다"26)라고 초기 비평가는 말했다. 이포리트 바이야(Hippolyte Bayard)의 자화상들인 <익사자>와 <눈감은 자화상>에서도 역시 모델인 바이야는 눈을 감고 있다. 초기 바이야의 사진 실행에서 "포즈시간은 어떤 대상의 촬영이건 내리쬐는 햇볕에서 적어도 수 분이었고, 경우에 따라 10분 또는 20분이 필요했다."27) 이런 초상사진에서는 실지로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을 기대 할 수 없다. 그런데 캐머런 부인의 모습을 기대 할 수 없다. 그런데 캐머런 부인의 사진에 찍혀진 모델들은 비록 그들이 우수에 차 있고 가끔씩 슬픈 음조로 출현하기는 하지만 모두 생생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잡혀 있다. 특히 그들은 그들의 흐릿한 전체적 윤곽에도 불구하고 똑똑히 그리고 분명히 눈을 뜨고 있다. 게다가 부인의 모델 중 몇몇은 어린아이들인데, <폴과 비르지니> 사진에서와 같이 그들은 완벽하게 우산과 다른 오브제를 쥐고 있고, 전체적으로 사진은 거의 스냅사진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촬영할 때 캐머런 부인은 그의 모델에게 사진의 좋은 결과를위해 몇 가지 주의점을 알려주고, 동시에 "그녀는 포즈를 취하는 동안 모델들이 호흡하고 그들의 눈 깜박임을 부드럽게 허락했다. 그러나 (부인이) 그들에게 사전에 미리 응시하도록 요구한 한 지점에서는 눈을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28) 이런 문맥에서 볼 때 캐머런 부인의 실질적 사진기 노출시간은 눈꺼풀의 움직임이 사진판에 자국을 남기지 않는 범위 내에 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사진에서 같은 노출시간의 조건이라고 할 때, 모델이 렌즈와의 거리가 멀수록 사진은 그 만큼 전체적으로 선명해 진다. 반대로 거리가 가까울수록 사진은 그 만큼 초점이 맞추어진 부분 근처 외에는 흐려진다. 이런 사실은 물론 렌즈의 심도에 관계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진기로부터 가까운 물체일수록 멀리 있는 물체보다 움직임에 대해 훨씬 더 예민하게 사진판에 자국을 남긴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이런 기술적인 이론에서 캐머런 부인의 확대된 듯한 큰 얼굴사진에서 보여지는 머리칼, 의복자락 등의 흐린 효과는 극단적으로 줄어진 심도나 혹은 긴 노출시간에서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아주 짧은 노출에도 움직임의 자국을 남기는 예민성에 관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가정적으로 만약 노출시간이 실지로 모델의 증언처럼 약 10분이라면 사실상 이러한 큰 얼굴사진(아마도 원경까지도)경우에는 그 얼굴 형태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사진이 될 것이다.
캐머런 부인의 사진에 적용된 긴 노출시간에 대한 세 번째 의문은 당시 부인이 사용한 습식 콜로디온 방식에 있다. 1851년대 이후부터 사용되었던 다른 모든 사진 감광 방식들 중 가장 탁월한 방식이었다. 발리끄르는 "습식 콜로디온 방식은 사진에서 활용된 모든 방식 중에서 가장 빠른 것(감광속도)이고 ...중략... 이런 방식을 택한 사진판은 대략 2초에서 60초 사이에서 포즈를 잡을 수 있다"29)고 그의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초기 발행년도는 1851년으로 콜로디온 시대의 초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후 15년 뒤의 습식 콜로디온 방식은 초기의 불편함과 성능보다 훨씬 간편해졌고 또 감광속도도 빨라졌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부인 할 수 없다. 더구나 1850년대를 거치면서 상업적 초상의 전성기를 맞아 콜로디온 방식으로 하는 초상사진의 노출속도는 단 몇 초에 이르는 놀라운 발전을 보게 된다. - 물론 이런 경우 사진판의 크기는 아주 작은 명함판이다. 그 당시 미리 사진판이 준비되어 사용의 보존과 처리가 편리한 건성 콜로디온도 널리 활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캐머런 부인은 건식 콜로디온 방식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 중요한 이유는 습식 콜로디온에 비해 훨씬 감광속도가 떨어진다는 사실 때문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부인의 사진에서 적용된 노출시간은 이론적으로 또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수 초 이내까지는 가능했다.
노출속도를 직접적으로 좌우하는 또 다른 요소는 사진기 안의 불투명 유리 위로 들어온 빛의 양이다. 사진에서 빛의 양은 조리개의 열림(f)에 달려있다. "조리개의 열림은 초점거리의 분할로 표시되기 때문에 조리개 f/8(예를 들어)로 잡혀진 모든 렌즈(어떤 종류이건)는 같은 빛의 양을 필름에 전달한다. 이러한 빛의 양은 렌즈가 열리는 면적(결과적으로 지름의 제곱)에 비례한다. 예컨대 f/4의 렌즈는 ...중략... f/8렌즈보다 두 배의 지름을 갖지만 빛의 양은 4배를 투과시킨다."30) 그리고 렌즈의 틀에 명시된 조리개 열림 표시는 그 렌즈의 가장 큰 열림 값으로 일반적으로 초상사진일 경우에는 적은 조리개 열림 값을 사용한다. 19세기의 사진에서도 마찬가지로 1840년대 오리진 페츠발렌 f/3.6의 경우 실질적으로 촬영시는 일반적으로 f/8혹은 f/5.6을 사용했다. 발리꾸르에 따르면 이런 조리개의 값으로도 노출속도는 초상사진 스튜디오의 아주 좋은 조건 속에서 평균 몇 초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게른햐임은 심각한 렌즈의 수차 문제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언제나 활짝 열린 조리개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부인이 사용한 조리개 값은 앞서 언급한 최대 열림 값 f/6 - f/7을 갖는 "자민'렌즈와 또 f/8의 "R-R 렌즈에서 대략 f/8정도 된다고 생각 할 수 있다. 이럴 경우 비록 장초점이라 할지라도 노출속도는 조명돠 사진판 면적을 생각하지 않고 볼 때, 오리진 페츠발 렌즈의 초상사진 촬영시 요구되는 노출속도와 같은 단 몇 초도 가능하다는 이론적인 추론을 얻을 수 있다.그러나 심각하게 노출시간을 연장시키는 두 요소는 큰 사진판과 약한 조명 때문에 부인의 사진이 요구한 노출시간은 적어도 수초가 아닌 보다 연장된 시간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사진판에서 필요한 빛의 양은 그 판의 면적에 의해 결정된다. 즉 캐머런 부인의 사진판 크기인 15 ݅12인치(약 38 ݅30cm)31)는 스튜리오의 초상사진에 쓰이는 1/4판 (14 ݅8.2cm)의 10배 가량 더 많은 빛을 요구한다. 따라서 포즈 시간도 논리적으로 10배의 시간을 요구한다 - 여기서 하나 덧붙인다면 사진판의 여분(사진판 콜로디온 처리시 손가락 자리를 위해 가장자리를 남기고 처리한다)을 보다 많이 쓰는 부인의 경우 실지로 인화된 영화 사진은 사용된 사진판보다 더 작게 나오기 때문에 노출시간은 조금 줄어 들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특별히 약한 조명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부인의 사진촬영은 노출시간을 정상적인 조명 아래의 경우보다 적어도 두, 세 배 이상 연장시킨다. 그러나 촬영시 모델과 상황에 따라 조명의 방식이나 강도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사실상 이러한 노출시간을 정확히 계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으로 앞서 우리가 본 몇몇 분석을 고려해 본다면 캐머런 부인이 사진 촬영시 필요했던 노출시간은 적어도 1분을 초과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은 단지 사진판에 감광되는 순수한 노출시간을 말한다. 부인의 한 모델이 증언한 10분 가량 포즈시간은 아마도 모델의 입장에서 본 자신이 생각한 포즈시간 일 것이다. 다시 말해 초점 잡는 시간, 사진판 준비와 교환시간, 노출시간 또한 반복된 포즈시간 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총괄적인 촬영시간을 의미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줄리아 마가렛 캐머런 부인의 초상사진에서 나타난 흐린 효과는 부인의 순수한 "의도'에 비롯되었을까? 만약 부인이 작은 사진기를 선호했다면, 화면을 꽉 채우는 실물 크기를 주장하지 않았다면 또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수직조명에 만족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사진들은 아마 보다 선명했고 또한 모델들을 고문의 연속으로 끌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초상사진은 얼굴의 세밀한 부분까지도 찍을 수 있는 초상사진 전문렌즈가 필요하고, 또 당시 널리 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의도적으로 평범한 대중용 렌즈를 선호했던 것 같다. 그러한 사실에 결정적인 신빙성을 갖게 하는 것은 부인이 1866년 자신의 사진기를 선명한 사진을 보장하는 당시 새로운 제품의 사진기로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들은 여전히 흐렸다는 사실이다. 게른샤임이 그의 연구결과 "캐러런 부인은 모델에 대해 초점을 잡기도 전에 먼저 조급하게 노출32)을 시작했던 것 같다"33)라고 추측한 사실을 고려해 볼 때 흐힌 사진효과는 의도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게른샤임 자신도 부인의 의도성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피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 "만약 부인이 흐린 효과의 의도를 가졌다면 그녀는 "R-R"렌즈 시판 년도와 같은 해인 1866년에 초상사진용으로 시판된 달메이어의 "연초점 렌즈"를 샀을 것이고, (이 렌즈로)단순히 나사를 돌리면서 선명한 윤곽을 흐린 효과로 쉽게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캐머런 부인은 이 렌즈를 사지 않았다."34)
그처럼 기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진의 흐린 효과가 부인의 의도였는지는 모호하다. 캐머런 부인이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헨리 캐머런Henri Cameron(자녀들 중 유일하게 사진사가 됨)은 자신의 어머니가 쓰던 사진기로 아주 선명한 사진을 얻었다고 한다. 이런 결과로 그는 어머니의 사진에 보여진 흐린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어머니가 의도적으로 연초점 효과를 노렸다고 추측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머니가 찾고 있었던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시각적인(피상적인)것에 중요성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결과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직감에 의해 실행했다 : 다시 말해 모델의 이미지가 어머니에게 보다 강렬하고 특징적으로 몽롱하게 보였을 때 어머니는 그때 그렇게 재현했고, 그러나 반대로 어머니가 선명한 사진이 모델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때는 또 그렇게 실행했다."35) 결국 캐머런 부인의 흐린 사진 효과는 기술적 측면에서 어떤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인 행위로 간주 될 수 없다. 부인의 사진에서 "우선적으로 그녀가 찾는 것은 모델이 발하는 영감적인 상태 혹은 그 존재étre36)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캐머런 부인에게서 흐린 효과는 그림적 효과를 위한 단순한 물질적 효과가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인 표현으로 직감적이고 초월적인 시각에서 나온 예술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주요 참고 도서
* 줄리아 마가렛 캐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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