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bout Photograph

# 결정적 순간(1952)

-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사진 보고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진이 형식면에서 충분히 완전하고 엄격하다면,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하나의 온전한 보고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다. 불꽃을 튀게하는 테마의 개개의 요소들은 자주 동떨어져 있어서 그것들을 억지로 영상속에 모으려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거짓일 수가 있다. 그 대신에 완전한 영상의 측면에서 보다 많은 사진들 속에는 상호 보충적인 소재의 요소들이 통합될 수 있는 보고서가 있다.
이처럼 사진 보고서는 문제를 표현하고 사건을 확정해서 일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머리와 눈과 손이 동시에 단계적으로 제시되는 시도이다. 사건이란 사람들이 알맞은 해결책을 추구할 때 그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어느 정도 사건의 윤곽만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다기(多岐)한 무엇이다.
해결책을 발견하는 데는 한두 시간이 소요되기도 하지만 많은 시간과 기일이 필요하기도 하다. 특허받은 해결책은 없으며, 늘 요긴한 처방도 없다. 공이 네트위로 넘어올 것에 항상 대비하고 있는 테니스 선수처럼 그렇게 준비 상태여야 한다. 현실은 그저 들어가 간단히, 그리고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골라 끄집어내 오기만 하면 될 정도로 매우 풍요롭게 나타난다.
그러나 늘 올바른 것을 붙드는가? 사람들은 일할 때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의식해야 한다. 사람들은 때로 이미 가장 효과적인 사진을 찍었다는 느낌을 가진다. 그러면서도 사건의 추이를 확실하게 예견할 수 없으므로, 사진찍는 일을 계속한다.
하지만 너무 성급하거나 기계적으로 찍는 것은 경계해야 하며, 기억을 방해하고 전체적인 인상의 명료성을 침해하는 과도한 스케치를 준비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기억은 대단히 중요하다. 사건이 진행되는 동일한 템포로 찍었던 각 사진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작업 중에 어디서도 간격을 허용하지 않고 모든 것을 표현했다고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뒤에 그것을 알게 되면 너무 늦다.
우리들 사진작가들에게 그와 같은 선택의 과정은 두 번에 걸쳐 얼어나며, 동시에 그것은 고통스런 체념에 대한 두 번에 걸친 동기가 된다. 한번은 우리가 현실 자체를 조사자로서 눈앞에 대하고 있을 때이고, 또 한번은 발전해서 고정된 영상에 직면하여 사실에 충실하긴 하지만 작용에서는 더 강력하지 못한 영상들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할 때이다.
상당히 늦어지고서야 비로소, 어느 정도가지 자기의 과제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일하는 동안 종종 일정한 개별성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진행중인 사건과는 심리적인 접촉의 중단, 즉 잠깐 동안의 머뭇거림을 야기시킨다. 눈동자가 초첨을 잃고 우리의 시야가 불확실한 것 속에서 헤매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것은 단 한 번으로도 충분한데.
우리들 모두에게 있어 공간은 눈을 통해서 그 시작을 갖게 되고 거기서부터 확장된다. 공간은 그 현존의 모습으로 크든 작든 강한 인상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의 기억 속에 직접 파고들어 그 속에서 변화한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표현 수단 가운데 사진만이 특정한 순간을 포착한다. 우리는 다시 사라져버릴 사물이나, 이미 사라져버려 다시 소생시킬 수 없는 사물을 취급한다.
사람들은 사진찍힌 대상을 더 이상 변화시킬 수 없으며, 자기의 보고서를 위해 기껏해야 그가 만든 여러 영상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작가는 완전한 문장을 쓰기 전에 심사숙고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는 또한 더 많은 요소들을 서로 결합시킬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또한 뇌가 편안히 휴식하는 순간이 있기도 하고 소재들의 체증 현상이 있기도 하다.
우리들 사진작가들에게는 사라져버린 모든 것은 단연코 사라져버린 것이 된다. 그래서 이것은 사진작가들의 불안의 원인이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상 우리들 행위의 원모습인 것이다.
우리가 호텔로 돌아가 한 번 더 보고서를 작성할 수는 없다. 우리의 과제는 사진기가 표현한 스케치북을 가지고 현실을 관찰하고 확정짓는 데 있는 것이지, 그에 따라 조종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 보고서를 장만할 때, 사람들은 좌우의 입장을 참고하는 중재자의 입장을 조금쯤 취하기는 한다. 즉, 그들은 필요에 따라서 침입자가 되기도 한다. 조용한 생활이 문제될 때에도 대단히 신중하게 본성을 숨기고, 그러나 형안[炯眼:본질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안식(眼識]을 가지고 그의 대상에 접근해야만 한다. 낚시를 하려면 물을 흐리지 않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비록 여전히 인색한 자연의 빛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섬광촬영은 금물이다. 다른 경우라면 사진작가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공격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의 직업은 단 한마디의 말이 모든 것을 부패하게 하고 모든 것을 얼게 만들수 있도록 그가 자신과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 놓은 관계에 의존한다. 또한 이 점에 자기 자신과, 늘 눈에 띄는 사진기를 가능한 한 의식하지 않도록 하는 것 외에 세계 공통의 법칙은 없다.
반응은 지역과 환경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르다. 동양의 모든 지역에서는 참을성 없고 혹은 성급한 사진작가들이 커다란 웃음거리가 되고, 전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과욕이 앞선다면, 그리고 그의 장비를 보고서 누군가가 그를 알아차리게 된다면, 사진찍기를 그만두고 수많은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 이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2. 영상 구성
하나의 주제가 강도 있게 통용되려면 형식적인 문제에 대한 단호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사진기는 대상과의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간속에 배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구성의 광범위한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나에게서 사진이란 현실내의 표면, 윤곽, 음영의 일정한 리듬을 확정하는 것이다. 눈은 이러한 현실에서 그것의 주제를 재단해 내고, 장비(사진기)는 그때 눈동자의 결정을 필름의 표면에 입력시키는 책임을 진다.
사진은 그림처럼 총체적으로 단번에 관찰되어진다. 사진의 구성은 동시적인 어떤 것의 배열이며 광학적인 요소의 조직적인 배치이다. 구성은 아무렇게나 할 수 없다. 구성에는 필연성이 존재하며, 내용과 형식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사진에는 갑자기 나타났다가 변하는 선의 기능인 조소라는 새로운 형식이 있다. 우리들의 매체는 변화하고 있으며 그것은 일종의 삶의 예감이다. 사진은 이 변화 가운데 표현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의 눈이 하는 일은 항상 측정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무릎을 약간 굽힘으로써 원근이 바뀌고 머리를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움직여도 특정한 선을 발견하게 된다.
영상은 사진기의 셔터를 작동시키는 바로 그 순간에 거의 구성되며, 사진기를 대상에 가까이 접근시키느냐 아니면 멀리 떼어 놓느냐에 따라 개개 특성들은 설계되고 배속되며 지배된다.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여 무엇인가가 일어나길 기다리는 일이 자주 있게 되고, 때로는 모든 것이 흐트러져 버림으로써 어떠한 영상도 갖지를 못하느 경우가 있다. 때로 어떤 사람이 영상 표면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사람들은 탐구자의 눈으로 그의 발자취를 추적하고 주저한 끝에 마침내 돌진하여 합당한 무엇을 얻고는 집을 향해 돌아선다.
나중에 완성된 사진에서 황금 분할이니 혹은 다른 기하학적 비율을 발견하고선 기뻐할 수 있으며, 아마도 바로 그 순간에 셔터를 열면서 그것이 없었더라면 사진이 무정형이고 힘이 없었을 기하학적 비율을 직관적으로 확정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영상 구성은 우리들의 끊임없는 관심사이지만 사진을 찍는 순간에는 거기에 대한 생각은 단지 직관적일 뿐이다. 그 이유는, 우리는 모든 과계가 계속적으로 변하는 유동적인 현상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사진작가는 황금분할을 적용시키는데 눈 이외의 다른 좌표를 사용하지 않는다.
모든 기하학적 분할 내지는 하나의 도식에 맞는가의 여부는 사진이 찍히고 현상되고 인화되었을 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행해질 수 있다. 이는 단지 나중에 살펴볼 문제이다. 바라건대, 우리는 사진 판매상인이 기하학적 비율을 새긴 초점유리를 판매하려고 내놓는 날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포맷의 선택이 구성상의 커다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정방형의 포맷은 측면이 동일하기때문에 정태적인 경향을 보이며, 특이하게도 정방형의 회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전부터 느슨했던 구성이 암실, 확대기, 네가티브 사이를 거치는 동안에 구제되는 경우는 아주 간혹 있지만 잘된 사진을 아주 조금이라도 잘라내면 비율의 이러한 역할은 어쩔 수 없이 파괴되고 만다. 즉 피사체의 통일성이 상실돼 버린다.
여기서 이야기된 유일한 앵글은 영상 구성의 기하학적인 앵글이다. 중요한 것은 영상구성의 기하학적인 앵글이지, 누군가 피사체 앞에 엎드리거나 혹은 영상의 작용을 극대화하려고 어떤 다른 극단을 취하면서 만들어낸 앵글이 아니다.
나는 이 글에서 사진의 특정한 양상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진에는 산업광고사진에서부터 비밀편지함 속에서 누렇게 변해 가는 조그마한 감동적인 사진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다른 양상들이 있다. 결코 나는 사진을 일반화시켜 정의하고 싶지 않다.
내가 볼 때, 사진(의 본질)은 한편으로는 한 사실이 갖는 내적 의미의 동시적인 그리고 번개처럼 빠른 인식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표현하는 광학적으로 파악가능한 형태계의 엄격하고 숨김없는 구조의 인식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과, 동시에 우리에게 작용하고 또한 우리가 작용을 미칠 수 있는 외부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에 균형이 잡혀져야 하고, 두 세계는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하나의 유일한 전체를 이룩해야 하며, 우리는 그러한 개념을 전달하려 해야만 한다.
물론 그것은 단지 영상의 내용에 관계되는 일이나, 나에게는 형식과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형식을 우리의 관념과 느낌이 구체적이고도 전달 가능한 것으로 형성되는 엄격하고 조소적인 조직으로 이해된다. 사진의 영역에서 이러한 시각적인 조직은 단지 조형적인 리듬이 자발적인 수용에 의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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