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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선 칼럼 - 제2부 현대성의 불꽃 <사진, 새 시좌전>

· about Photograph,photographer

한국사진은, 좀더 정확히 80년대 한국현대사진은 일대 혁신을 꿈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시대의 흐름 때문이기보다는 암담한 한국사진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시대사적 과제와 소명이었기 때문이다.

글 | 진동선 (사진평론가·현대사진연구소장 sabids@hanmail.net)
  
민주화의 시대 80년대에 바야흐로 한국사진에도 중대한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변화의 움직임은 외부적으로 사회 전반에 확산되는 민주화의 열기, 여기에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눈부신 경제 성장에 따른 국제화, 세계화의 염원으로부터 온 것이다. 내부적인 관점에서 보면 80년대 한국사진의 소통 구조와 활용 메커니즘이 보다 다양해지고, 이에 따라 사진학과 증설, 사진전공자들의 기하급수적인 팽창에 따른 결과이다. 한국사진의 변화의 바람은 복합적인 것이고 시대사적인 것이었다. 모든 사회가 서로의 고리가 되어 동축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진만 이로부터 배제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정신에 맞게 현대성을 구현하려는 노력들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눈물겨웠다고 하는 것은 당시 사진의 정황이 너무도 암담한 것이었고, 너무도 요원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사진의 아마추어리즘은 매우 뿌리 깊은 것이었다. 사진의 순수성이 주류 사단의 모토였고, 공모전 위주의 ‘누가 누가 잘하나’ 하는 콘테스트의 양태는 여전히 한국사진의 힘이었다. 뿐만 아니라 철학부재, 미학부재의 단사진 스타일은 변함없는 ‘결정적 순간’의 꽃이었기에, 현대사진의 형식성이란 그저 카메라를 속이지 않는, 있는 그대로 스트레이트하게 찍는 것이 미덕이었다. 이런 정황들은 한국사진의 주류인 사협의 각종 공모전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게 아니라 대학, 대학원 사진학과에서도 관행화 된 아마추어리즘의 표상이었다. 때문에 한국사진은, 좀더 정확히 80년대 한국현대사진은 일대 혁신을 꿈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시대의 흐름 때문이기보다는 암담한 한국사진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시대사적 과제와 소명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새 시좌전>의 출현 동기와 정체성
1988년 5월 18일 워커힐 미술관에서 <사진, 새 시좌전>이 열렸다. 구본창, 김대수, 이규철, 이주용, 임영균, 최광호, 하봉호, 한옥란 이상 여덟 명의 사진가들이 참여한 전시는 80년대 후반 한국사진계를 뜨겁게 달궜다. 이들은 모두 유학파였고, 또 유학파였기 때문에 실제 사진들과 무관하게 이른바 메이킹 포토(만드는 사진)라는 불명예와 더불어 ‘서구사진의 수입’, ‘서구사조의 수입오퍼상’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이제 ‘사진, 새 시좌전’이 한국현대사진의 신호탄이 되고 새로운 사진문화의 출발점이 된 전시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너무도 자명하게 그 증거들이 우리 앞에 제시되기 때문이다.
‘사진, 새 시좌전’은 전시로 끝나지 않았다. 한국사진에서 보기 드물게 세미나가 개최되고 사진평론가 김승곤에 의해서 포스트모더니즘 사진, 사진적 컨셉의 문제 그리고 뉴 웨이브 스타일의 현대성이 공개적으로, 아카데믹하게 담론화 되었다. 현대사진이론은 이미 1985년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에서 등장한 바 있고, 그보다 일찍 1983년 봄 [계간미술] 특집 <사진과 미술>을 통해서 “사진과 회화의 만남”(이 일), “현대 사진예술의 변모”(강운구), “전달매체로서의 사진”(육명심)이라는 테제에서 사진의 새로운 활용과 사진과 회화를 넘나드는 조형 양식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특집에서 강운구는 1978년 뉴욕근대미술관(MoMA)의 기획전 [Mirrors & Windows]에서부터 최근 현대작가들의 동향으로서 로버트 하이네켄, 루카스 사마라스, 베르나르 포콩, 존 팔의 사진과 표현 형식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나 현대사진에 대한 논의는 전적으로 정보 차원이었다. 당대 이론가들이 척박한 토양에서 나름대로 어렵게 어렵게 공부하여 설파한 현대사진이론이었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수용하여 실천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폭넓게 지지를 받았던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도 실천적 양식이 되지 못한 정보 차원의 이론으로 자리하고 말았으며, 또 다른 이론가 육명심의 사진사 강론 또한 실천적 양식으로 연결되지 못한 정보 차원의 사진이론이 되고 말았다. 정보 차원의 이론에 머물렀다는 것은 이론이 튼실하지 못했다는 말도, 우리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을 수용하지 못했다는 말도, 국제적인 양식으로 자리했던 뉴 웨이브 스타일을 수용하지 못했다는 말도, 그 시대 대표 주자로 거론된 신디 셔먼, 바바라 카스텐, 루카스 사마라스, 로버트 하이네켄, 레슬리 크림스 등 서구 현대사진가들의 작품 경향을 수용하지 못했다는 말도 아니다. 시대사적 변화에 직면하여 서구의 현대성의 논의들을 우리에 맞게 흡수, 검증, 소화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사진은 대단한 변화의 시기였다. 특히 사진전공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급격한 시대적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사회문화 환경에 노출되고,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전환이 필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빈다면 이제 한국사진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보는 방식과 사고 체계의 변화가 요구되었던 시기였다. 전후 세대의 출현, 컬러 텔레비전, 게임, 오락실, 워크맨, 스포츠 문화에 익숙한 신세대의 출현, 과거와 다른 환경과 새로운 문화적 토양에서 새롭게 성장한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 있었기에 사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표현 방식이 종래와는 달리 현대성에 걸맞게 실천적인 모습이 폭넓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적, 실천적인 모습은 답보 상태에 있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사진, 새 시좌전’ 단 한번의 전시 앞에서 무력하게 되고, 전시의 여파는 곧장 정체 불명의 사진들의 난무, 한번 흉내내보기, 유희적, 표피적 스타일이 대유행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예견했다면 현대사진의 제 경향들이 정보 차원에서 말해질 게 아니라 서구사진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것들이 우리에게 전파, 수용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점을 경계하고, 또 어떤 점을 우리에 맞게 수용, 각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심층적인 검토가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서구사조가 유입될 것을 예견했다면 충격완화 장치로서 실제 적응력을 충분히 길렀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사진, 새 시좌전’이 개최되었을 때 가장 부정적인 모습만 수용되는 우를 범했다. 현대사진을 이론적으로 주도했던 당시의 이론가들은 이미 현대사진의 제 경향을 여러 네트워크를 통해서 알았다. 그리고 학생들과 일반 아마추어들에까지 현대사진의 이론을 전파했으나 정작 본인들의 사진에 적용시키지 못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시대의 코드, 시대의 감각과 지금까지 추구했던 자신의 사진미학과 연결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으로는 수용했으나 몸에 의한 실천이 불가능했고, 강의를 받았던 학생들도 지식은 전수 받았으나 정신적으로 무장되지 못하고, 실천적 경험 또한 없었기 때문에 문제점을 야기한 것이다.
‘사진, 새 시좌전’은 전시를 통해 현대성의 담론을 공고히 했다. 이는 실천적 징후를 흔적으로, 흔적을 이론으로 연결하는 역사적 맥락을 유지한 것이다. 당시 한국사진에 현대사진에 대한 텍스트가 없었던 것도 아니며, 경향과 스타일에 대해 몰랐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진, 새 시좌전’처럼 전시를 통해서 구현하지도, 풍부한 담론으로 이끌지 못했고, 개개인의 실천적 양식으로도 구현되지 못했다. 반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이제 막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이거나, 현대사진의 제 경향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던 사람이다. 그들의 나이는 30대, 이미 이전과 다른 문화 환경과 사고 체계를 갖고 있었다. 창작과 표현의 자율성이 몸에 익숙해 있었고, 급격한 시대의 조류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시대적 코드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출 수 있었고, 새로운 사진에 대한 실천적 양식을 실험해 보일 수 있었다.
  
<사진, 새 시좌전>에 대한 비판은 정당했는가
사조든, 미학이든 혹은 예술론이든, 사진에 관한 제반 이론은 논증 가능해야 한다. 논증 불가능하면 이론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하기도 어렵고 설득력도 떨어진다. ‘사진, 새 시좌전’이 과연 현대성을 구현했는가, 전시된 작품들이 내용적, 형식적으로 현대성에 부합하는가, 또한 전시 의의와 결과가 담론 혹은 텍스트를 통해 회자되고 이론적으로 논의되어졌는가를 논증할 수 있을 때 역사적 평가와 더불어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사진, 새 시좌전’은 분명한 컨셉, 기획자에 의해 치밀하게 준비된 전시는 아니었다. 전시가 한국사진의 모습을 뒤흔들고, 뒤바꿔 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러나 그것은 이후의 문제일 뿐, 전시의 구성은 그 결과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진, 새 시좌전’은 사전에 기획자에 의해 치밀하게 컨셉이 정해지고, 그 컨셉에 부합한 작가와 작품을 선정한 전시가 아니라 우연치 않게 한 사진가에게 전시 기회가 왔을 때 평소 생각과 평소 네트워크를 통해 알게 된 작가와 작품을 초대한 전시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사진, 새 시좌전’은 전시 이전과 전시 이후를 구별하여 말해져야 한다. ‘사진, 새 시좌전’의 가장 큰 취약점은 이것이다. 사전에, 컨셉에 의해 꾸며진 엄밀한 의미의 기획전이 아니었다는데 있다. 그것의 예증은 전시 서문에서 시작하여 작가 구성 그리고 출품작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전시 서문(육명심의 글)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은 크게 세 가지이다. 하나는 “새 세대에 거는 새로운 기대”, 하나는 “국제화의 양상과 유학파 등장”, 나머지 하나는 “한국사진사의 한 페이지의 장식”이다. 육명심의 예리한 판단과 혜안이 돋보이는 전시 서문은 이 전시가 심상치 않을 것임을,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자리할 것임을 내비치고 있다. 즉 전시가 마주치게 될 긍정적 요소, 부정적 요소 모두를 분명히 짚고 있는 것이다. ‘50년대 이후에 출생한 전후세대’, ‘영상언어의 1세대’, ‘국제적인 사진의 식견을 가진 유학파 1세대 사진가’, ‘선배들과 구분되는 새로운 세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선을 보인 전시이다. 이는 전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육명심은 “한낱 세계적으로 성행하고 있었던 새로운 사진사조를 국내에 유행시킨데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했을 것이다”라는, 가정법적인 경계의 목소리를 남겼던 것이다.
‘사진, 새 시좌전’은 육명심의 예측대로 긍정과 부정의 모습을 연출한다. 전시는 한편으로 한국사진에 유학파의 출현을 알리고, 새로운 사진의 모습을 알리고, 과거의 세대와 다른 새로운 사진의 감각과 문화적 의식의 출현을 알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세계적으로 성행하고 있는 새로운 사진사조를 국내에 무비판적으로 유행시킨 범인으로 지목된다. 물론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참여 작가들이 유학파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러나 그들이 현대사진의 제 이론에 대한 명료한 이해, 서구사진이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현대성을 반영했는지에 대한 확고한 검증,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동시대 철학으로 무장한 작가들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예견된 일이었다. 전시된 작품들이 80년대 뉴 웨이브 양식이 아니었음에도 학생들과 젊은 세대들이 무비판적으로, 일방적으로 추종, 답습, 모방했던 것은 유학파들의 시대의식의 실종이라기보다는 한국사진의 단조로운 형식성, 즉 편식에 따른 허약한 체질 때문이었다.
  
<사진, 새 시좌전>은 현대사진의 양식성을 자각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새 시좌전>의 현대성을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컨셉 부재의 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진의 전환점, 현대성의 단초로서 자리매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사진, 새 시좌전’을 통해서 두 가지 한국사진의 갈등 구조를 목격할 수 있고, 또한 앞으로 있을 <한국사진의 수평전>을 통해서 한국사진에 어떤 헤게모니가 있었는지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사진, 새 시좌전’에서 선보인 사진들은 엄격히 말하면 서구사진도 아니고, 서구에서 유행한 현대사진의 양식성도 아니다. 아마 이제 되돌아 보면 출품된 사진들이 80년대 서구에서 맹위를 떨친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이 아니었음을, 탈 장르적인 뉴 웨이브 양식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80년대 서구사진의 사조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이었다. 그러나 ‘사진, 새 시좌전’의 어느 작가도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다. 80년대 서구사진의 양식성은 뉴 웨이브 스타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사진, 새 시좌전’의 어느 작품도 뉴 웨이브 양식에 속한 사진이 아니었다. 그 전시 속에는 80년대 서구사진의 이론에 입각한 작가도, 당시 유행한 서구사진의 양식을 수용한 작품도 없었다. 가장 파격적이었던 구본창, 김대수, 이규철의 작품은 서구사진이라기보다는 회화성(구본창, 김대수)과 조각성(이규철)에 가까운 작품이었으며, 결코 서구사조를 차용하거나, 서구사진의 모습을 무조건적으로 수입한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서구사진을 수입하고 형식을 차용한 작품들은 한국현대미술에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80년대 현대사진에 대해서, 그리고 서구사진의 실제적인 모습에 대해서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채 유추하거나, 국내에서 흔히 보지 못한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런 것으로(회화적인 것을 서구적인 것으로 착각한) 오독(誤讀)한 결과이다.
‘사진, 새 시좌전’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현대사진의 양식성을 구체화시킨 전시였다. 전시는 매우 아이러니하게 역사를 거꾸로 올라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성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모더니즘의 근대성으로 나아간다. 양식성의 혼란은 결코 서구 현대사진의 의식 없는 수용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일찍이 받아들이지 못한 사진의 근대적 개념, 즉 6, 70년대 개념사진의 실종, 사진의 시간성과 공간성에 대한 현대적 개념의 부재가 서구사조의 무분별한 수용으로 오도된 것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오히려 여과없이 현대사진의 제 이론과 경향을 설파했던 이론가들에게 있을 것이고, 또한 스트레이트 포토에서 메이킹 포토로 전환되기까지 가교 역할을 했던 6, 70년대 대표적인 사진 양식인 “개념사진(Concep
tual Photo)”의 부재로 인한 충격완화 장치가 없었던 한국사진의 안일함 때문일지 모른다. 80년대 서구사진은 개념사진에서 출발한 사진적 경향이다. 그런데 한국사진은 모더니즘을 우회했기 때문에 바로 이웃집인 한국미술과 달리 개념사진을 수용할 여지도, 토대도, 입지도 아니었고, 실천에 옮길 주체들도 아예 꿈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80년대 서구사진의 참모습이 될 수 없는 사진 앞에서 그토록 우려하고, 만드는 사진의 진원지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것은 한국사진의 슬픈 자화상이다. 전시를 통해서 우리는 처음으로 서구사진을 인식했고, 서구사진의 양식성을 인식했으며, 그에 대한 담론들을 생산하게 되었다. 우리 것을 생각해 본 것이다. 이는 전례없던 일이다.
<사진, 새 시좌전>이 전시문화에 일대 혁신을 주었는가
한국의 예술사진은 개인전에서 출발했다. 1929년 3월 29일 이땅에서 처음으로 정해창(鄭海昌)이 서울 광화문 빌딩에서 <예술사진 개인전람회>를 개최했다. 강상규의 [한국사진사](1976)와 최인진의 [한국사진사](1999)는 공히 이를 증거하고 있다. 한국의 예술사진이 태동기부터 정해창과 서순삼 같은 사진가에 의한 개인전을 통해서 구현되었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국사진은 개인전보다 단체전이, 창작사진보다 공모전 컨테스트 사진이 문화의 중심에 자리했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상설전시의 중요성이 간과되고, 사진 전용공간 확보에 실기(失機)했고,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스스로 역사적 아카이브(사진기록물)를 소실시키는 우를 범했다. 한국사진이 지금까지도 어려운 여정에 있고, 사진에 대한 인식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것은 지난 역사 속에서 오로지 공모전에 몰두하고, 역사적 아카이브에 대한 인식과, 작품으로서의 시장성에 무관심한 채 오로지 아마추어 순수지상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결과이다. 공모전 사진문화가 낳은 최대 병폐는 작가의 존재를 부인하고, 작품의 존재를 부인하고, 사상과 철학의 근간이 되는 시대정신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사진의 예술성과 기록적 가치는 시대정신의 발로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문화적 역량은 미술관과 박물관에 소장된 예술작품의 질적 수준과 그 방대한 수집량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국사진은 이것들이 없다. 우리의 문제이고,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할 역사적 부채(負債)인 것이다.
한국사진의 전시 양태는 개인전의 모습에서 단체전의 모습으로 급속도로 전개된다. 결정적인 요인은 공모전 때문이었으나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단사진 위주의 제작방식 때문이었다. 한 장으로 승부를 거는 콘테스트 문화, 그러다 보니 사진이 보여주는 방식은 언제나 그룹으로, 일회적으로, 컨셉 없이, 잔치 마당처럼 큰 공간에서 연례 행사처럼 한 두 점씩 출품하면 되었다. 60년대 초반까지 명맥을 유지하던 개인전 문화는 사진이 국전에 편입되고, 동아콘테스트, 동아살롱이 출현하고, 각종 공모전이 우후죽순 탄생함으로써 한 순간 종적을 감추기 시작했다. 전시에 의해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점수에 의해 작가가 됨으로써 전시의 본질은 초대작, 추대작, 입상작, 입선작들이 모여 펼치는 축제 마당으로 둔갑했다.
한국사진의 전시 공간은 해방 이후 5, 60년대 중앙공보관 시절, 70년대 국립공보관, 신문회관, 출판문화회관 시절을 거쳐, 80년대는 좀 큰 전시를 위해서 서울갤러리(프레스센터), 작은 전시를 위해서 파인힐 갤러리, 한마당화랑, 프랑스 문화원 시절로 바뀌어 간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70년대에 들면서 작가들이 미도파 화랑, 롯데 화랑에서 전시를 갖기도 하고, 80년대에 들어서는 관훈미술관, 경인미술관과 같은 미술화랑에서도 전시를 갖는다. 그러나 그 모습은 무료 전시장, 값싼 전시장을 전전하는 눈물겨운 모습이다. 1981년 종로 2가에 파인힐 갤러리가 탄생할 때까지, 1983년 종로구 중학동에 한마당 화랑이 탄생할 때까지 한국사진은 공간다운 공간하나 마련하지 못했다. 사실 파인힐 갤러리도, 한마당 화랑도 누구나 인정할 만한 전문적인 사진전용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화랑은 80년대 한국사진의 현대성을 구현하고, 현대사진을 소개한 핵심 무대였다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두 화랑은 척박한 사진적 토양에서 유일하게 초대전을 유치했던 화랑이고, 언제나 사진을 볼 수 있는 상설전시의 기대감을 심어준 화랑이다. 만족스럽지 못한 여건이지만 암담한 현실에서 한국사진의 희망이 된 화랑들이다.
‘사진, 새 시좌전’이 전시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는 논증은 두 가지 관점에서 말해질 수 있다. 첫째는 미술 영역으로 공간 이동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전시문화는 초대전으로 치러진 것이 아니라 공공기관, 공공의 장소, 시민공간을 무료 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대관하여 치러진 전시이다. 사진이 미술관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일은 극히 드물었다. 사진에 대해 너무 배타적이었고, 사진을 너무 폄하했기 때문에 대관 화랑일지라도 사진의 경우는 심사를 받아야만 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워커힐미술관이
<사진, 새 시좌전>을 초대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예이다. 한국사진은 워커힐미술관을 시발점으로 이제 미술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전기를 마련한다. 그것은 사진의 영역 확장이자, 사진의 위상을 촉진하는 일이기도 했다.
둘째는 한국사진에 기획전의 중요성을 알리고, 이벤트의 필요성을 알게 했다. ‘사진, 새 시좌전’이 한국현대사진에 미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사진도 이제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사진도 이제 시대적으로 컨셉을 앞세운 기획전이 요청된다는 시대 인식을 갖게 했다. ‘사진, 새 시좌전’ 이후 연달아 터져 나온 <사진'89-90전>, <한국사진의 수평전>,
<관점과 중재전>,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등이 증거들이다. 기획전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구태의연한 동문전시, 동호회 전시를 밀어내고, 컨셉에 의한 전략적 전시 그리고 전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미나, 심포지엄 등 학술행사 및 이벤트로 연결되는 새로운 전시문화의 패러다임을 구축하게 했다. 이러한 시금석이 바로 ‘사진, 새 시좌전’이었다.
  
<사진, 새 시좌전>에 대한 역사적 물음
1988년 <사진, 새 시좌전>에 대한 사진계 내부의 비평적인 글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8년 계간 [사진비평] 창간호에 나타난다. 그토록 화제가 만발했고, 긍정, 부정의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전시에 대한 사진적 담론은 전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현대사진을 말할 때는 빠지지 않고 거론되고 회자되는 전시가 ‘사진, 새 시좌전’이다. 전시에 대한 비평이 무려 10년이 지난 다음에 나타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우리 사진이 얼마나 평가에 인색하고, 긍정이든 부정이든 가치판단에 무관심한가를 드러내는 본보기이다.
이제 ‘사진, 새 시좌전’은 스스로 역사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시점에 놓였다. 구본창이라는 한 사진가에 의해, 아주 우연치 않게 만들어진 전시가 그토록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전시에 대한 여러 가지 비난의 소리들은 결과적으로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다. 혼란은 있었지만 한국사진은 오히려 건강해지고 표현의 자율성도 커졌다. 서구사조의 무조건적 수입, 서구사진의 수입오퍼상이라는 딱지가 달리긴 했어도 전시를 통해 한국사진은 더욱 세련되어졌으며, 이전에 없었던 담론의 장과 학술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물론 잊지 않는다. ‘사진, 새 시좌전’이 유명세만큼 준비되지 못한 전시였고, 유학파들의 잔치였고, 컨셉없이 개인적 인간관계에 의해 초대된 전시였음. 뿐만 아니라 이 전시가 상찬(賞讚)에 비해 역사적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8년 <사진, 새 시좌전>을 기억하고,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부정적 요소들을 뛰어넘는 한국사진의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던 점, 현대성의 불꽃이 되었던 점 때문이다. 한국현대사진은 이후 가속이 붙어 질주한다. 그리고 이제는 한 개인이 아니라 시대성을 자각하고,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보다 견고하게 무장된 행동적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더 힘찬 가속페달을 밟는다. ●
  
사진, 새 시좌전에 참여한 8명의 작가 중 김대수씨의 작품
한마당 갤러리
1988년 5월 워커힐 미술관에서 열린 ‘사진, 새 시좌전’의 전시장면. 해외 유학파 8명이 참여, 새 바람을 일으켰다.
파인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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