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to site

진동선 칼럼 - 제1부 80년대 한국현대사진의 토대들

· about Photograph

한국현대사진의 흐름 1980~2000
제1부 80년대 한국현대사진의 토대들
  
한국사진에 모더니즘은 있었는가. 모던의 의미 그리고 그것의 사진사적 구현 방법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누가 우리 사진을 향해 “한국사진에 모더니즘, 모던에 대한 사진사적 구현이 있었는가?”를 물었다면 자신 있게 “이것이 한국 모더니즘 사진이다”라고 제시할 작가도, 이론가도 없을 것 같다.

글 | 진동선 (사진평론가·현대사진연구소장 sabids@hanmail.net)
  
시작에 앞서...
2003년은 사진이 이 땅에 도래한지 120년이 되는 해이다. 최인진이 쓴 [한국사진사]에 따르면 1883년 여름 이 땅에 처음으로 김용원이 서울 묘동에 촬영국을 설치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1863년 3월 18일 동지사은사 이의익(李宜翼)이 중국 북경 러시아인 사진관을 방문해 초상사진을 찍었다고 하니, 조선인이 사진에 찍힌지 14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사진이 이 땅에 근대의 상징으로, 그리고 서구문명의 증표로서 수용되고 정착된지 120년. 사진은 그 동안 개화 백경, 식민지 풍경, 해방공간, 6.25, 개발독재, 군사독재,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아주 숨가쁘게, 종축으로 역사성을, 횡축으로 시대성을 부여안고 달려왔다. 지금 우리가 사진에 보내는 시선은 그래서 각별하다.
이 글은 한국현대사진, 즉 1980년부터 2000년까지 이 땅에서 전개됐던 “컨템퍼러리 포토(Contemporary Photography)”에 대한 주된 흐름을 밝혀 보려는 글이다. 총 20부작으로 구성될 이 글은 물론 한국현대사진의 정사(正史)는 아니다. 그것들은 사진사가들의 몫이며 이 글은 그 시대를 함께 했던, 그 시대를 지켜보았던 한 사진평론가의 개인적 관점의 글이다. 역사는 특히 정사는 풍부한 문헌에 의존한다. 역사는 매 시기, 역사적 전환기마다 시대를 관류했던 조망의 글과 통찰의 문헌들이 필요하다. 그것들을 기초로 정사가 만들어 진다. 지난 한국사진의 역사가 얼마나 기록에 무심했고, 기록적 가치를 간과했는지를 우리 모두는 잘 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생각에서 쓰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 모더니즘 사진의 부재
한국사진에 모더니즘은 있었는가. 모던의 의미 그리고 그것의 사진사적 구현 방법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누가 우리 사진을 향해 “한국사진에 모더니즘, 모던에 대한 사진사적 구현이 있었는가?”를 물었다면 자신 있게 “이것이 한국 모더니즘 사진이다”라고 제시할 작가도, 이론가도 없을 것 같다. 이른바 임응식의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도, 현일영의 형식주의 사진도, 또한 신선회, 살롱아루스로 대표되는 리얼리즘 계보의 사진도, 누구도 이들 사진의 정신성과 형식성을 두고 역사적 맥락에서 한국 모더니즘 사진의 얼굴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징후는 있었다. 흔적도 있었고, 개별적, 개인적 사례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조로서, 경향으로서, 역사 속에서 굳건히 이론적 토대를 가졌던 이데올로기로서의 모습은 아니었다.
모더니즘은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 그에 따른 인간소외와 자아상실에 대한 철학적 다가섬이다. 모더니즘 사진이란 그런 점에서 사진적 자각이고 구현이다. 우리의 사진사에서 모더니즘은 국지적인 징후로서, 미미한 흔적으로서, 그리고 아주 파편적인 철학적, 이념적 텍스트로서만 자리한다. 하나의 이즘(ism)이 역사적으로 ‘징후’, ‘흔적’, ‘이론’이라는 세 가지 카테고리를 가지기는 쉽지 않다. 징후는 작가가 사상적, 철학적, 또는 미학적으로 체감한 이념적 산물이고, 흔적은 징후를 알아챈 작가가 표현으로 성취시킨 업적(작품)이며, 이론은 징후와 흔적들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텍스트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에게 모더니즘 사진이 있었다고 한다면 역사적 맥락에서 징후, 흔적, 이론이라는 세 가지 카테고리에 부합한 사례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요동친 70년대 한국사진의 정황들
한국사진은 모더니즘을 우회(by-pass)했다. 즉 모더니즘을 인식하지 못한 채 시대적 정황에 급작스럽게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했다. 모더니즘 끝자락에 있었지만 모던 사진(Modern Photo)의 개념조차 헤아리지 못한 채 컨템퍼러리 사진(Contemporary Photo)과 만나게 된 것이다. 그에 대한 대혼란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 스트레이트 포토와 메이킹 포토의 논쟁, 이른바 찍는 사진과 만드는 사진의 시비에서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근대사진과 현대사진의 차이는 무엇인가. 80년대를 현대사진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80년대의 사진이 70년대의 사진과 명백하게 구별된다면 과연 그것들이 3가지(징후, 흔적, 이론) 역사적 맥락에 부합하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80년대 사진이 우리의 현대사진이라면 형식적, 내용적으로도 완벽한가. 이에 대한 물증이 확고해야 우리는 한국에서의 컨템퍼러리 사진, 즉 한국은
80년대에 현대사진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논의할 내용은 80년대 한국사진의 정황이지만 그러나 70년대 한국사진의 정황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70년대 한국사진은 5.16 군사혁명 최대 수혜자인 한국사진작가협회(사협), 적지 않은 힘을 가진 동아일보사진동우회(동아콘테스트 출신들로 구성된 단체), 그리고 재야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보인 포토 저널리스트 그룹이 있었다. 정황들로서는 1971년 한국사진작가협회와 한국창작사진협회가 통합, “한국사진협회”로 출범한 사협이 한국사진의 중심으로서 국전, 한사전을 최대 관심분야로 키워 왔다. 동아일보사진동우회는 이명동, 임응식이 주도하여 사협에 근접한 세력으로서 리얼리즘 사진을 표방했으나 상당수가 임응식이 주도한 창작사진협회 회원이었기 때문에 창작사진협회가 사진작가협회와 통합됨으로써 양쪽에 어중간하게 다리를 걸치게 되었다.
반면, 70년대 비주류 혹은 재야로 불렸던 포토 저널리스트 출신의 그룹은 조직력은 없었으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또 다른 세력이었다. 70년대는 또 대학 사진서클이 왕성해서 고대 호영회, 연대 연영회, 숙대 숙미회와 같은 새로운 시각의 젊은 대학생들과, 공모전에 물들지 않은 젊은 신진 세력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계한 세력이 포토저널리스트 그룹이다.
70년대는 이렇듯 공모전 위주의 사협이 한국사진의 주류로 자리하고, 바로 옆에 견제 세력으로서 동아일보사진동우회 그룹이 자리했으며, 그 주변부에 시대의식을 차별화했던 비주류 사진그룹이 자리한 형국이었다. 당시에도 저널이 있었다. 70년대의 저널로는 1966년에 창간한 <월간사진>, 1975년에 창간한 <영상>, 그리고 1977년에 창간한 <사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잡지들은 시대에 조응하는 사진이론, 시대를 반영하는 사진적 방법론, 그리고 작가들의 잘못된 창작 행태를 비판하는 비평적 기능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시기적으로 모더니즘 끝자락에 있었으나 근대의 징후, 흔적, 이론에 대해 저널로서 기능을 펼쳐 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80년대 한국사진의 정황과 현대성의 토대
현대사진을 말할 때 상당수 사람들은 1988년 5월 18일 서울 워커힐미술관에서 개최된
<사진, 새시좌전>을 신호탄으로, 그리고 1991년 11월 16일 경기도 장흥 토탈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사진의 수평전>을 분수령으로 이야기한다. 사진사 맥락에서 볼 때 분명 두 개의 전시는 한국사진을 바야흐로 꽃피우게 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전부라는 생각은 옳지 못하다. 역사와 문화가 단 몇 차례의 이벤트에 의해 바뀌지 않듯이, 사상과 이념이 한 순간 천지개벽처럼 뒤바뀌지 않듯이, 한국현대사진도 파종은 70년대이고, 발아는 80년대이며, 성장은 90년대이다.
한국현대사진의 토양은 여러 관점과 여러 각도에서 관찰된다. 80년대 현대사진은 우선 1985년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1985년은 한국현대사진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잠시 존 자코우스키(John Szarkowski)가 미국현대사진의 토대를 언급했던 3가지 사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존 자코우스키는 미국현대사진의 출발점을 1950년대로 규정한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1952년 <어퍼추어(Aperture)> 창간, 1955년 <인간가족전(The Family of Man)> 개최, 1959년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The Americans)> 출간을 든다. 세 가지 사안은 명료한 역사성과 시대사적인 이론의 토대가 된다.
요컨대 징후의 사례로서 <인간가족전>, 흔적의 사례로서 <미국인>, 이론의 사례로서 <어퍼추어>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존 자코우스키의 진단이 매우 객관적인 물증이라면 우리도 80년대 한국사진에서 유사한 사례를 대입시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80년대 한국사진은 아주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먼저 현대의 토양으로서 사진전문 갤러리가 출현한다. 1981년 종로2가에 <파인힐갤러리>, 1983년 마포 성산동에 <TS Gallery>, 1984년 종로 중학동에 <한마당 화랑>, 1985년 혜화동 대학로에 <여백>이 나타난다. 사진전문잡지도 출현한다. 1984년에 사진무크지 <시각(Camera Work)>, 1987년에 월간지 <IMAGE>, 1988년에 <포토 291>, 1988년에 사진논총 <밝은방>, 1989년에 월간 <사진예술>이 창간된다. 사진전문이론서도 출판된다. 1985년에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 1986년에 <열화당사진문고>, 1987년에 육명심의 <세계사진가론>이 출판된다. 그리고 또, 보다 중요한 현대성을 반영한 전시들이 쏟아져 나온다.
1985년 <구본창사진전>과 그의 <긴 오후의 미행>, 1985년 김영임의 <여의도>, 1986년 최영돈의 <뉴컬러>, 1986년 김영수의 <현존>, 1987년 김남진의 <이태원의 밤>, 그룹전으로서는 1987년 구본창, 배병우, 최영돈의 <다른 컬러 이미지 셋>, 1987년 <제3그룹전> 등등, 1988년 <사진, 새시좌전>까지 한국사진은 80년대 들어 비옥한 토양에서 여러 현대의 싹을 틔운다. 현대성을 드러낼 토양은 중요하다.
<파인힐갤러리>, <한마당화랑>에서는 현대성을 반영한 작품들을 전시했고, 사진 아카데미를 겸한 갤러리 <여백>과 <타임스페이스갤러리>에서는 외국사진작가의 작품을 전시했다. 무크지 <시각>과 사진논총 <밝은방>은 정기, 부정기적으로 의식 있는 한국사진가들의 작품을 포트폴리오 형식으로 출간했으며, 사진전문지 <Image>, <포토 291>, <사진예술>은 국내외 수준 높은 사진과 세계사진의 최근 조류를 제공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과도기적 상황이었다. 모더니즘의 상황도 아니었고, 서구에서 몰아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황도 아닌, 매우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현대성의 발화, 현대성의 이행
한국현대사진은 그 같은 토양 위에서 이제 누가 어느 시점에서, 어떤 모습으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새로운 시대에 부합한 새로운 사진의 모습을 발화시킬 것인가만 남았다. 그를 위해서는 세 가지 사안이 요구되었다. 먼저 불을 지속적으로 태울 수 있는 장작, 순간적으로 불길을 키울 수 있는 기름, 그리고 불씨를 던질 점화자가 필요했다. 1985년을 기점으로 이것들이 나타난다.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이론)가 장작, 1988년 워커힐미술관에서 개최된 <사진, 새시좌전>(흔적)이 기름, 그리고 유학파 구본창이 점화자였다. 1985년을 한국현대사진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컨템퍼러리 사진의 이론을 제공했던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 현대사진의 불씨를 지핀 구본창 모두 1985년에 출현한다. 물론 이들이 전부가 아니다. 그 시대 보이지 않는 장작, 기름, 불씨가 되었던 현대사진의 발화점들도 상당하다.
예컨대 중학동 주명덕의 작업실, 그리고 그가 간행한 무크지 <시각>, 동교동 김장섭 작업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만든 무크지 <사진마루>, 또한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를 졸업하고 대학로에 사진 아카데미 <여백>을 오픈한 김민숙, 전시 기획을 통해 도도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진평론가 김승곤의 <타임스페이스>와 <TS Gallery>, 그리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새로운 시각과 사진적 방법론을 강단에서 펼친 젊은 강사들, 이들 역시 무시 못할 동인(動因)들이다.
그러나 80년대 현대사진의 장작은 현대사진이라는 국제적 사조와 경향을 광범위하게 알린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였다. 미국현대사진에서 <Aperture>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광범위한 이론적 확산, 즉 텍스트를 통해 시대인식을 고양시킨 점이다.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는 독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세계적인 컨템퍼러리 사진의 모습과 그 경향을 알게 했던 유일한 텍스트였다. 아마도 이 시기를 거쳐왔던 젊은 세대(특히 지금의 40대)에게는 현대사진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사진대학 및 사진아카데미에 있었던 사람들은 새로운 이론에 밝았던 교수로부터 강의실에서, 대학의 사진서클의 경우 자체 스터디를 통해서 현대사진의 제 사조를 알게 되었을 것이나 그렇지 못했던 일반 사진인에게는 <현대사진의 조류>가 유일한 교과서였다.
1985년 2월 독일에서 구본창이 귀국했다. 그의 출현은 한국사진의 새로운 판도, 즉 급작스러운 한국사진의 지각변동을 예고한다. 비슷한 시기에 여러 유학파들의 귀국이 있었으나 그가 한국사진에서 매우 중요한 일을 수행하고 지금까지도 중심에 선 것은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한국현대사진의 장본인” 혹은 “사진, 새시좌전을 통해 한국현대사진을 발화시킨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솔직히 그것은 한 개인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 아니다.
당시 그는 그럴 만큼 충분한 이론적인 토대를 갖고 있지도 못했고, 또한 그런 일을 독자적으로 추진할 만큼 행동적 진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때 그는 단지 시대에 부합한 시계를 차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사진에 스타가 필요할 때 스타가 될 수 있었고, 사진의 위상이 높아져야 할 때 위상을 높일 수 있었고, 사진이 충무로를 벗어나야 할 때 벗어날 수 있었고, 학생들이 눈 높이에 맞는 선생을 요구할 때 눈 높이에 맞출 수 있었고, 한국사진이 국제교류가 필요할 때 가교가 될 수 있었고, 사진시장이 요구되었을 때 시장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절대적 능력보다는 시대에 부합한 시계 혹은 코드가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한국사진에 있었다. 근대를 건너뛴 우리사진, 즉 한국사진이 모더니즘을 건너뜀으로써 있어야 할 인프라, 정상적인 궤도축 그리고 시대에 부합할 현대성의 메뉴판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현대라는 시대의 격랑이 사진으로 넘쳐왔을 때 우리는 컨템퍼러리라는 시간축을 맞출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사진이 만약 미술, 음악, 문학, 영화처럼 정상적으로 모더니즘의 토대를 일궈왔다면 구본창이라는 한 개인의 힘은 절대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지 못했기에 시대의 격변기 앞에서 한 개인의 능력과 감각과 순발력에 이끌린 경우이다. 구본창은 한국사진의 무 계보였다. 따라서 주종관계도, 수직적 위계도 없었다. 거기에다 외국에서 막 공부하고 왔기 때문에 자신의 감각과 시대의 감각이 일치했다. 그도 처음에 무 계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한국사진의 시계와 맞지 않아 고전했다. 그러나 시대는, 우리는 점점 그에게 시간을 물었다.
돌이켜 보면 한국사진은 다양한 분야에서 장작이 되고, 기름이 되고, 불씨가 됐던 모습들이 있다. 개인적이고, 국지적으로, 그리고 아주 작은 일부이지만 작품, 이론, 정신, 이념 하나로 현대성을 구현했던 작가, 이론가, 선생님들이 있었다. 이 글은 이제부터 그들이 어떻게 한국현대사진의 장작이, 기름이, 불씨가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물론 반대로 그들이 시대에 역행한 행동들 그리고 비역사적이었던 정황들과 풍경들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선, 비평적 목소리를 낼 것이다. 한국현대사진의 발화점이라고 말해지는 1988년 <사진, 새시좌전>에서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된다. ●
주1) Jonathan Green, <A Critical History American Photography>, Harry N. Abrams, Inc.,1983, P. 69

All Posts
×

Almost done…

We just sent you an email. Please click the link in the email to confirm your subscription!

OKSubscriptions powered by Strikingly